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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해 별글이 May 16. 2023

나를 만나는 중입니다.

비로소 안정하게 된 나의 애정 결핍

어제 출석한 심리학 개론의 주제는 동기와 정서였다. 교수님은 학자들이 여러 각도로 조망한 동기에 대한 이론들을 설명하셨다. 네 가지 이론 중 가장 마지막에 설명된 매슬로우의 욕구 위계 이론에 이르렀을 때 고등학교 때 스치듯 배웠던 욕구 피라미드를 자세히 들여다본다. 교과서에서 볼 때와 사뭇 다르게 1번부터 4번까지 욕구와 5번의 욕구가 결핍 욕구와 존재 욕구로 갈라져 있다.

어제 눈부신 태양 아래에서 들은 수업

잠깐 강의를 멈췄다. 나의 욕구는 어디에 있는지 제대로 직면해 보고 싶었다. 언뜻 보기에 나는 피라미드 가장 꼭대기에 있는 자아실현의 욕구를 위해 애쓰는 인간인 듯했다. 수업을 듣기 직전에도 글을 하나 올리고 만족감에 몇 번을 읽어보다 공부를 시작한 나였다.


물과 얼음의 밀도 차 10%.
빙산은 10%의 일각만 드러내고
바다 위를 떠다닌다.


1912년 처녀 출항한 타이타닉호는 보이는 10%의 일각이 빙산의 전부라 생각한 사람들의 늦은 대처로 결국 뉴욕항에 닿지 못했다. 이후 사람들은 그 배의 항로를 빙산의 골목 (Iceberg Alley)라 부르고 보이지 않는 90%를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타이타닉의 비극은 나의 성장을 가로막는 보이지 않는 무엇을 찾아내야 한다는 메시지를 보낸다. 보이지 않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면 결국 숨어있는 빙산에 배가 좌초되듯 모든 마음이 어둠의 덩어리에 좌초되어 죽은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조언이었다. 차마 두려워 의식할 수 없는 그 어둠 속, 흔히 무의식이라 부르는 마음의 90%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 알아내고 싶어 졌다.


자아실현의 욕구는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와 범주가 다르다. 나는 어느 쯤에 속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글을 쓴 후 나의 행동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내가 쓴 글을 여러 번 반복해서 읽었다고 했지만 사실 ‘나로서 존재할 수 있는 글을 써서 행복해.’라는 만족감으로 한 행동이 아니었다. ‘누가 내 글에 하트를 눌러 줄까?’라는 기대를 하며 읽고 또 읽고 있었다.

나를 울고 웃게 했던 '좋아요'의 하트

‘좋아요’의 개수에 따라 내 어깨의 평수도 달라진다. 잘 썼다는 피드백이 돌아올 때 어깨는 지구를 가득 메울 만큼 펴지지만 조언이나 무관심이 돌아오면 뒤주에도 들어가고 남을 만큼 줄어든다. 고매한 척, 타인의 평가와 반응에 자유하다 말하지만 사실 좋은 반응과 관심을 얻지 못했을 때면 여지없이 상처받고 의기소침해졌다. 나의 원초적인 본능이 무엇을 원하는지 의식하지도 못한 채 자아실현을 하겠다고 덤벼 댔으니 쓸모없이 받는 상처는 아름답지도 않고 약이 되지도 않은 채 회의와 비난만 야기해 버렸다.


비단 글을 쓰는 현재의 삶에만 국한된 경험들은 아니다. 20대 때 나는 CGV 매니저로 꽤 좋은 평가를 받으며 살았다. 물론 꿈꾸던 다른 직업이 있었지만 함께 일하는 상사와 동료들에게 인정받은 능력과 대기업 사원이라는 소속감은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미련을 달콤한 우울로 포장할 수 있을 만큼 만족감을 주었다. 하지만 결혼 전, 사랑에 눈이 멀게 된 나는 남편과 함께 살고 싶은 욕망 하나로 이직을 하겠다며 퇴사면담을 했고 만류하던 상사는 승진을 시켜 발령까지 내 버렸다.


이후 내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대전에서 만난 상사는 ‘퇴사하겠다는 협박으로 발령받아 온 인간’, ‘결혼하고 곧 있으면 출산 휴가를 들어갈 여자’라는 꼬리표를 붙여 냉담하게 대했다. 어제까지 인정받는 일꾼이던 내가 한순간 받기 싫은 일감이 되어 있었다. 인정도 소속감도 없이 내돌리는 상황 속에서도 나는 무의식에 휘둘려 끊임없이 인정과 소속을 구걸하며 살았고 상사는 나의 출산 스케줄까지 직접 짜 주며 야멸차게 대했다. 견딜 수 없었던 나는 결국 발령 3개월 만에 사직서를 써야 했고 나를 조정하는 무의식으로 변명 한 마디 하지 못 한 채 직전 상사에게 갖은 모욕을 들으며 아름답지 못한 퇴사를 해야 했다.


인정과 소속의 욕구가 결여된 상태를 쉬 부르는 애정 결핍이란 말이 참 듣기 싫었다. 누군가 내게 그런 말을 꺼낼 때면 뜨거운 당혹감으로 손사래를 쳤고 다시는 그런 말을 듣지 않으려 애써 밝은 사람인 채 하고 살았다. 결핍된 욕구로 인해 당연히 타인 지향적인 인간이었던 나는 화가 나도 하고 싶은 말 한마디 하지 못한 채 속으로 밀어 넣기 일쑤였고 외유내강이란 그럴 싸한 사자성어를 들먹이며 타인에게 관대하고 너그럽게 굴었다. 나에게 나는 항상 못 마땅했고 매우 미운 존재였지만 그 감정들의 근원을 알 수는 없었다. 유기될까 불안했고 단절될까 두려워 늘 타인을 향해 안테나를 뻗었고 응답을 기다리며 우울하게 살았다. 내가 가진 안팎의 모든 문제들은 받을 수 없어 무의식으로 밀어 넣어버린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존중받고 싶은 욕구가 야기한 것임을 인정하기까지 41년이 걸렸다. 그리고 13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해고당하듯 퇴사한 나와 화해할 수 있게 되었다.

영원한 사랑을 뜻하는 튤립으로 나에 대한 사랑을 맹세한다.

많은 생각 끝에 지질한 나를 마주하며 잘 데리고 살 수 있는 방법이 궁금해졌다. 다시 강의를 재생하고 수업에 집중한다. 교수님은 최근 매슬로우의 욕구 위계 이론에 6단계가 추가되었다고 부연 설명 했지만 결핍 욕구를 채우는 방법이나 자가 치료 방법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은 채 과목의 특성대로 다음 이론 설명으로 넘어간다.


사회 적응을 위해 발달된 페르소나로 인해 필
요한 방향으로만 욕구가 의식화 되고
나머지 욕구들을 무의식에 밀어 넣으며 인간의 전체성이 깨진다
칼 구스타프 융


MBTI의 기반 이론인 분석 심리학에 따르면 전체성은 무의식과 의식이 통합된 ‘자기’를 뜻하며 이 '자기'를 자각하는 과정이 자기실현의 과정이라고 한다. 융은 그러므로 인생 전반기에는 사회 적응을 위해 살아간다면 인생 후반기에는 자신의 전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무의식 속 결핍된 욕구를 이제 막 인지하기 시작한 나는 그 과업의 10%를 이뤄 낸 것 같다. 완전한 자기를 이루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만 적어도 보이지 않는 90% 에 좌초되지 않도록 지질한 나를 사랑으로 보살피며 '자기'에 근접한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또한 삶이 무작위로 던지는 수많은 경험 속에서 만나게 될 새로운 나를 친절하게 맞이할 수 있는 성숙한 내가 되기를 바란다.  


그렇게 살다보면 언젠가 매슬로우의 6단계에 이르러 초월의 지대에 서서 다음 세대와 나를 이을 수 있는 진짜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겠지. 그런 나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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