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온해 별글이 May 19. 2023

어머님이 편찮으시다.

시어머니의 급체에 대처하는 개며느리 자세

한 번 틀어박히면 시간은 급류처럼 흘러간다. 각각 다른 사유로 어느 시각에 들어가게 돼도 결국 다음 날에 닿아 있다. 이럴 땐 시간의 등을 타고 날아갔다는 표현이 맞을까? 어쨌든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부여받고 자발적 고독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쟁취했다. 이보다 기쁜 혁명이 있을까? 잠자는 아이들 곁에 누워 핸드폰을 허공에 뻗쳐 들고 별 보듯 들여다보며 글을 쓰는 날은 이제 더는 없다.  

@jessbaileydesigns, 출처 Unsplash

어제도 그랬다. 저녁을 먹고 강을 씻긴 뒤 잠깐 숙제를 하고 나오겠다고 들어갔다. 깊은 사유에 빠져있을 무렵 조심스럽게 남편이 나를 불렀다.


“여보, 어머니가 저녁 드신 게 체했는지 편찮으셔. 방금 토하셨는데 여보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어머님의 안위가 걱정된 나는 급하게 글을 마무리 지어버리고 다시 의무의 세계에 돌아갔다. 어머님은 화장실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고 계셨다. 몇 번째 토하고 계신 건지 남편에게 물었다.


“두 번째. 아까는 조금 토하셨고 지금 많이 하시는 거야.”


아까 저녁 무렵 데이케어 센터에 반찬이 오늘따라 더 마음에 안 들었다, 툴툴대시며 밥만 꾸역꾸역 드셨다고 했는데. 정말 드시기 싫으셨던 것 같다. 13년째 함께 살고 있지만 토하시는 건 처음 본다.




나는 어릴 때부터 잘 체하기로 유명했다. 체해서 고생하는 날이면  엄마는  '뭐 한다고 급하게 (쳐) 먹고 체했냐'라는 핀잔을 쏟으며 나의 손가락을  바늘로 따 주었다. 고무줄로 손가락을 꽁꽁 묶어 불에 지진 바늘로 큐티클 바로 아래 혈자리를 찌르는 그 느낌이 얼마나 고통스럽던지.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따면 아픈 배가 스르륵 풀어지고 토가 멎는다. 현대 의학에서는 기함할 일이고 한방에서는 과학적이라고 우기는(?) 손가락 따기, 그 정체는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소화가 되지 않아 고통스러움에도 응급 환자 기준 미달이라 응급실에서 하세월 기다려야 할 때 감행해 볼 만한 행위다.


기진한 몸을 이끌고 침대에 누우신 어머님 곁에 앉는다.


“어머니, 내가 손가락 따 드릴게. 좀 앉아보셔.”

“바늘로 찌르면 아프자녀. 무서운데.”

“배 아픈 거보다 낫지. 하나도 안 아픈데, 어서 일어나 보셔.”

“몇 개나 딸 건데?”

“나는 열 손가락 다 따는데 어머님 싫으시면 엄지, 검지, 약지만 딸게.”


못 이긴 척 일어나 앉으신 어머니 등 뒤로 앉아 등뼈를 따라 탕탕 두드려 본다. 아프다고 하시면서 연신 트림을 꺼억 꺼억하신다. 이어 따주기 침을 소독하고 알코올 솜으로 어머님의 손가락을 닦는다.


“아이고, 우리 어머니 손도 곱지. 내 손 보다 더 하얗고 보들보들하네.”

“내가 손도 그렇고 속살도 하얗지. 그런데 얼굴이 누레 가지고. 바껴야 하는데..”


여든넷이 되어도 우리 어머님은 당신 외모에 불만 많아 툴툴거리는 사춘기 소녀다.

“따끔~” 소리를 내며 손가락을 딴다. 연신 아프다고 하시는 어머님, 엄살이 심하시다, 놀려대며 피를 닦아 낸다. 약속한 손가락만 양손으로 따고 다시 등을 두드린다.


“아까만큼 안 아프네.”


그래도 아직 배가 아파서 못 주무시겠다는 어머님을 위해 우리는 거실에 잠깐 앉아있었다. 이내 불과 티브이를 끄고 주무신다. 이게 손 따기의 힘이지. 논리적이고 과학적으로 증명해 보라고 하면 가설조차 세울 수 없지만 효험하나 끝내주는 이상하고 아름다운 우리나라 민간요법.




오늘 아침은 강이 먼 나들이 (보통 소풍 공동육아에서 이르는 말)를 가는 날이므로 도시락을 싸야 했다. 양파, 당근, 호박, 햄을 차례대로 다진다. 칼질이 서툴 땐 푸드 프로세서가 유용했는데 칼잡이가 되고 나니 기계는 설거지만 늘릴 뿐이다. 도시락만 6년째 싸고 있으니 칼질부터 담기까지 30분이면 끝난다. 한 김 식히기 위해 잠시 화구에서 내려놓고 어머님 죽을 쑬 준비를 한다.

이 정도는 눈감고 싼다

흰 죽이 편하지만 어제 토도 하셨고 최근 피검사에 나트륨 수치 기준 미달이란 진단을 받으셨으므로 간간하게 계란죽을 끓인다. 고지혈증, 고혈압이 있으니 소금보다 갈아 놓은 해산물 가루에 액젓 한 숟가락을 더해 육수를 만든다. 여기에 밥을 넣고 보글보글 끓이다 풀어 둔 계란물을 얌전하게 둘러 익을 때까지 기다린다. 그릇에 덜어 내기 직전 볶은 깨와 참기름을 살짝 얹으면 고소하고 맛있는 계란죽이 완성된다. 아침을 차리고 어머님께 가보니 나갈 준비를 하고 계신다.


“어머니, 오늘 하루 집에 쉬시지!”

“나, 멀쩡 혀. 안 아파.”


주연: 어머님의 고운 손

나가신다는 고집을 어찌 꺾을 수 있겠나. 나는 그냥 말없이 나와 강의 빨간색 보온통을 꺼낸다. 아침으로 드실 죽 한 그릇을 내고 남은 죽을 보온통에 쌌다.


"아이고, 맛있다. 꼬수허니."

“입에 맞으셔? 어머니, 오늘 점심까지는 죽 드세요. 안 그러면 오래 고생하신다.”

“귀찮은데. 손에 들고 가기 귀차녀. 나 그냥 센터에서 밥 조금 먹고 말게.”


남편이 설득해 보지만 도무지 우리말은 듣지 않으신다. 진짜 귀찮으신 건지 맛이 없어 그러신 지 약간 헷갈릴 정도다. 남편이 다짜고짜 어머님의 작은 백 안에 죽통을 욱여넣어 드린다.


“아이고, 여기 들어가니 간편하게 들고 갈 수 있겠네. 갔다 올게.”




학교 도서관 봉사가 끝난 뒤 강을 데리러 다녀왔다. 그 사이 겸은 피아노 학원에 가고 없고 대신 어머님이 집에 돌아와 계신다.


“아이고, 나 오늘 네 칭찬 엄청 많이 받았어. 시어머니 아프다고 죽 싸주는 며느리가 어디 있냐고 거기 있는 할머니들이며 선생들이며 어찌나 칭찬하는지 말이여. 나, 그리고 죽 맛있게 잘 먹었어. 이제 진짜 하나도 안 아파.”


이런 날 이 정도는 먹어야 되지 않것어요.

머쓱하다. 나는 어머님 생신도 까먹는 개며느린데.




매거진의 이전글 바쁜 걸로 돈 벌고 싶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