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본 없는 서사가 펼쳐지는 곳
엎어진 커다란 돔 사이사이 촘촘한 밧줄이 거미줄처럼 이어져 있다. 유연하고 자그마한 어린이들만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촘촘함. 그 그물 위에는 수십 명의 아이들이 매달려 있다. 한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높이가 어른들은 아찔하기만 하다. 귀한 내 새끼, 떨어지면 어찌하나 불안한 눈을 거두지 못하고 아래에서 서성이며 떨어지는 모래만 한없이 맞고 서 있다.
그러나 몇 해를 다녀도 그곳에서 떨어진 어린이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면 아수라장이 따로 없는 그물 위 아이들은 나름의 규칙과 질서를 가지고 그곳에 매진하고 있으니까. 올라가는 어린이들은 아래의 친구가 다치지 않나 살펴보고 있고 아래에 있는 어린이들은 자신이 올라갈 수 있는 기회가 올 때까지 기다린다. 일부 초등학교 중학년 이상의 남자 어린이들이 아래, 위 살필 겨를 없이 위로만 향할 때가 있지만 그래도 누군가의 손을 밟거나 밀치지 않는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렇다. 어른들의 눈에는 혼돈의 카오스가 따로 없고 언제 누가 떨어진들 이상할 것 없을 만큼 위험천만해 보이지만 그 속에서 어린이들은 암묵적인 질서와 자신을 지키는 지혜를 가지고 정온하게 목표를 향해 오른다. 제일 꼭대기에 이르면 그 너머로 유유히 흐르는 금강이 보인다고 하니 못해도 10m는 되는 높이에 서서 어린이들은 뿌듯함을 느낀다.
이제 내려올 차례. 미끄럼틀의 경사가 제법 가팔라 초기에는 탈 수 있는 어린이들이 별로 없었다. 대부분의 어린이들은 그물에 누워있거나 오른 그물로 다시 내려갔다. 하지만 놀이터의 역사가 흐를수록 ‘좀 놀아 본’ 어린이들이 많아질수록 미끄럼틀을 탈 수 있는 어린이들이 늘어났다. 그리고 지금은 대부분의 어린이들이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온다. “쟤가 하면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 의심이 용기를 북돋아 준다. 연습 삼아 한 번 내려온 뒤에 꼭 엄마나 아빠를 불러 앉혀 놓는다. 미끄럼틀이 끝나는 그곳에. 그리고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내려와 엄마, 아빠에게 달려온다. 부모는 세상 반갑고 대견한 표정으로 어린이를 맞으며 엉덩이를 툭툭 두드려 준다.
어렵고 지난한 그물을 버티고 가파르고 어두운 미끄럼틀을 견뎌낸 어린이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우리가 삶을 살아가며 필요한 덕목들을 배운다. 자신의 선택에 불안 대신 용기를, 알 수 없는 결과에 두려움 대신 기대를 안고 오르내리는 어린이들의 태도에서 말이다. 어떤 영화보다 극적이고 어떤 드라마보다 감동적인 이 각본 없는 서사를 지어내는 어린이들은 훗날 어떤 어른이 될까? 그 어른들을 만날 그날이 기대되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