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여행] 바우하우스 part3

익숙하면서도 낯선 바우하우스의 역사 제3편

by 에세이 매거진


애플의 수석 디자이너 조나단 아이브는 디터람스의 디자인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모던 디자인의 출발점인 바우하우스를 이해하기 위해 그 탄생과 발전 과정을 살펴봅니다.


미스

미스터

마이스터


칸딘스키와 클레 외에도 바이마르에서 뎃사우로 이전하면서 유능한 젊은이들로 부족한 교수진을 보강했는데, 그들은 일명 ‘젊은 마이스터들 (Jung Meister)’이라 불렸다. 이 중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가구 공방 소속의 마르셀 브로이어(MarcelBreuer, 1902~1981)이다. 모더니즘 의자의 아이콘으로 대변되는 ‘바실리의자’가 바로 그의 작품이다. 그 의자는 칸딘스키의 교수주택에 들어갈 목적으로 만들어져 ‘바실리’라는 별칭이 있었는데 그것이 오늘날 공식적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전통적 소재인 목재 대신에 금속이나 천, 가죽을 이용해 가구를 제작했다. 가죽과 금속으로 만든 기능적이고 세련된 바실리 의자는 언제 보아도 아름답다.


헤르베르트 바이어(Herbert Bayer, 1900-1985)가 고안한 유니버설(Universal) 서체 디자인 (이미지 출처: widewalls.com)


한편 인쇄 공방 소속의 헤르베르트 바이어(Herbert Bayer, 1900-1985)는 바우하우스의 학생으로 시작하여 마이스터가 되었으며 타이포그래피 분야에 일대 혁신을 일으켰다. 쓸데없이 장황한 고딕체나 세리프체를 대체하기 위해 단순하고 명료한 산세리프 활자들만 사용하였다. 이를 위해 그 자신이 1925년에 ‘유니버설(Universal)’체를 만들기도 했다. 이 서체는 산세리프체의 특성을 고스란히 담아냈는데 가장 기본적인 기하학 형태를 사용하여 단순하고 합리적인 구조를 이루어냈다. 또한 그는 대문자 사용도 생략하였으며 조판에서는 양끝정렬 대신 오늘날 많이 사용하는 왼쪽정렬을 실험하였다고 한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하고 명료한 그의 타이포그래피 작업에는 바우하우스의 정신이 깃들어있다.


맨 오른쪽에 유일한 여성 마이스터 군타 쉬텔쯜(Gunta Stölzl,1897-1983)이 눈에 띈다. (이미지 출처: bauhaus-movement.com)


젊은 마이스터들이 함께 찍은 단체사진을 살펴보면, 한 여성이 눈에 띈다. 그녀는 바로 유일한 여성 마이스터였던 군타 쉬텔쯜(Gunta Stölzl,1897-1983)이다. 그녀 또한 본래 1919년 가을에 바우하우스에 입학한 학생이었다. 그녀는 가장 탁월한 도제였고, 1922년 직인시험에 합격하여 나중에는 직물공방의 실직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그녀가 운영하던 직물공방은 바우하우스에서 사업적으로 가장 성공을 거둔 분야 중 하나였다.


그로피우스

꽃피우다


바우하우스의 지속적인 발전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탄압을 극복하기는 어려웠다. 그로피우스는 본인이 떠난 바우하우스를 맡고 있던 모홀리나기(Laszlo Moholy-Nagy, 1895-1946)를 해임하고, 정치적으로 중립적이었던 미스 반 데어 로에를 임명시켰다. 나아가 당시 가장 정치적으로 자유로웠던 베를린으로 또 한번 이전하게 된다. 하지만 나치스의 탄압으로 바우하우스 베를린마저 해산하게 된다. 그러나 바우하우스의 해산이 그 이념 자체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바우하우스 베를린이 해체된 이후에도 그로피우스를 비롯한 많은 바우하우스 교수들은 미국으로 건너와서 그들의 예술적 이념을 새로이 꽃피우기 시작했다. 1937년, 시카고에 있는 미술, 산업협회의 회장은 새로운 디자인 연구소의 설립을 구상하고 그로피우스에게 자문을 청했다. 그 결과 모홀리 나기를 새로 설립하는 학교의 학장으로 초빙하여 개교 준비에 들어갔다. 새 학교는 미술, 산업협회의 후원을 받아 비영리 교육기관으로 출발하게 되었는데 모홀리 나기와 그로피우스의 협의에 의해 학교 이름을 <뉴 바우하우스>로 정하고 <미국디자인 학교>라는 부명을 덧붙였다.


베를린에 위치한 바우하우스 아카이브 전경 (이미지 출처: myartguides.com)


그러나 앞으로의 발전이 유망하게 보였던 뉴 바우하우스는 오래가지 못했다. 1938년 8월에 갑자기 이 학교의 관리자 측인 미술, 산업협회회장으로부터 여름방학 이후에는 학교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는 통고를 받게 된 것이다. 1939년 1월말, 모홀리 나기는 외부의 재정원조에 의존하지 않는 자신의 연구소를 설립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의 생각에 동조하는 협력자들은 연구소의 재정 상태가 좋아질 때까지 무보수로 강의하겠다고 선었했다고 전해진다. 안타깝게도 1946년 11월 24일, 모홀리나기는 백혈명으로 사망했다. 그가 죽은 다음 그로피우스는 고문 자격으로 머물면서 연구소의 발전에 계속 기여했다. 1956년 4월 30일, 미스 반 데어로에가 설계한 일리노이 공과대학 크라운 홀이 개관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디자인 연구소는 이곳으로 이전해서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고 한다.


바우야

놀자


‘바우야 놀자’는 2014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바우하우스 무대공방이라는 전시의 일부이다. 우리에게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무대 공방 또한 바우하우스의 주요 공방 중 하나였으며, 실험적인 시도로 많은 주목을 받았다.


오스카 슐렘머(Oskar Schlemmer, 1888-1943)가 이끄는 무대공방을 위한 코스튬을 착용한 학생들 (이미지 출처: uncubemagazine.com)


바우하우스는 오늘날 전 세계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하나의 건축과 디자인 정신으로서 한편으로는 체계적인 교육시스템으로서 오늘날 전 세계에 퍼져있다. 가령, 우리나라의 파주 타이포그래피 학교(PaTi)가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뎃사우 시절부터 시카고 디자인 연구소까지 일생을 바우하우스와 함께했던 모홀리 나기는 «디자인 기획인의 자세»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 이것은 그의 마지막 연설이자 최후의 바우하우스 정신과 다름이 없다.


디자인은 직업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자세, 즉 디자이너의 마음의 자세이다. 모든 일을 결정하는 것은 정신이다. 우리들은 한 걸음 한 걸음 젊은이들의 창조적 재능이나 능력이 개발되는 교육적인 과정을 발전시켜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이면 누구나 손으로 작업할 경우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작업은 지식으로서 그의 머릿속으로 옮겨갈 것이다. 이러한 지식은 거꾸로 그의 정서적인 자아에 반대로 작용할 것이다. 그것이 높은 차원의 개성이 획득 되어지는 방법이다.
모홀리 나기의 «디자인 기획인의 자세» 중에서


애플의 수석 디자이너 조나단 아이브(Jonathan Paul Ive)는 아이폰이나 아이팟의 디자인이 실은 디터 람스(Dieter Rams)의 디자인을 참고한 것이라는 고백한 바 있다. 디터 람스는 브라운의 디자인을 반석에 올린 전설적인 디자이너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또한 바우하우스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디자이너다. 바우하우스의 정신이 전해내려와 아이폰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다. 어쩌면 100여전 전 독일 청년들의 손에 들려져 있던 바우하우스 선언문의 정신이 오늘날의 아이폰이 되어 우리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이 아닐까.


1933년 촬영된 당시 바우하우스 학생들의 모습 (이미지 출처: tomvandeputte.com)


정진욱 Chung Jinwook


Reference

권명광 엮음, «바우하우스», 미진사, 1984.
진중권, «서양미술사 모더니즘 편», 휴머니스트, 2011.

하요 뒤히팅, 윤희수 옮김, «어떻게 이해할까? 바우하우스», 미술문화,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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