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여행] 바우하우스 part2

익숙하면서도 낯선 바우하우스 역사 제2편

by 에세이 매거진


애플의 수석 디자이너 조나단 아이브는 디터람스의 디자인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모던 디자인의 출발점인 바우하우스를 이해하기 위해 그 탄생과 발전 과정을 살펴봅니다.


바우하우스 VS 바우하우스


바우하우스의 이념은 꽤 야심 찼으나 일반 사회에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았었다. 1923년, 설립 4년 만에 최초로 비로소 대규모 전시회를 개최하면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전시회는 8월 15일에 시작되어 9월 9일까지 열렸는데 바우하우스의 이념이 건축을 중심으로 한 모든 미술의 통합인 만큼 건축 전시가 가장 핵심적이었다. 그것은 게오르그 무헤의 실험주택이었는데, 여기서 바우하우스의 변신을 인상적으로 보여준 것은 철저히 기능에 따라 공간을 배분한 암호른 주택이었다.


1923년 게오르그 무헤(Georg Muche, 1895-1986)에 의해 설계된 실험주택 내부 모습 (이미지 출처: Pinterest)


이 집은 공업용 재료로 저렴하게 대량으로 짓는 산업적 건축의 원형이었다. 그것은 바우하우스 촌의 최초의 주택이며, 소규모이지만 당시로는 가장 사치스럽고 기능적인 주택으로 주목을 받았다. 결과적으로 전시는 대성공이었고 비로소 일반사회의 대대적인 관심을 끌게 되었다. 이 전시를 통해서 지금까지의 성과를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갖가지 실험적 시도를 보인 것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게 되어 이후 발전의 디딤돌이 되었다.


각 분야에 걸친 활동이 궤도에 올라 바우하우스에 결실의 계절이 찾아드는 것처럼 보인 1924년 봄, 바우하우스의 앞 길에는 암운이 떠돌기 시작했다고 한다. 1925년, 우익이 바이마르 의회를 장악하면서 학교에 대한 압력이 심해졌던 것이다. 결국 1925년 3월 말, 바우하우스와 튀링겐 연방정부와의 계약은 해소되었고 바우하우스는 창립 후 만 6년 만에 문을 닫았다.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였던 바우하우스에게 뎃사우의 시장으로부터 제안이 왔다. 마침내 바우하우스는 그 창립지인 바이마르를 떠나 뎃사우로 이전하기로 한다.


보통 바우하우스라고 하면 등장하는 건물의 이미지가 바로 바우하우스 뎃사우 교사이다. (이미지 출처: Pinterest)


하우스 오브

바우하우스


뎃사우로 이전하여 바우하우스가 입주해 있던 시립 공예학교는 공간이 절대적으로 비좁기 때문에 새로운 교사가 필요했다. 1925년 가을에 착공된 이 역사적인 건물은 1926년 12월에 비로소 완성되었다. 보통 바우하우스라고 하면 등장하는 건물의 이미지가 바로 이때 지어진 데사우 바우하우스의 건물이다. 그로피우스는 교사 개관식 연설을 통해 바우하우스는 출발 이래 많은 오해를 샀으나 마이스터들과 학생들의 노력으로 마침내 오늘과 같은 만족할 만한 상태에 도달하게 되었으며, 흥미롭게도 얼마 동안은 바이마르와 뎃사우에는 각기 두 개의 바우하우스가 존재하기도 했다. 두 지역 간의 협의 끝에 1926년 4월 1일 이후부터 바이마르에서는 <바우하우스>라는 명칭을 포기하는 협정을 맺었다.


지상에서 바라본 뎃사우 교사의 발코니 실루엣이 바우하우스 특유의 직선적인 스타일을 보여준다. (이미지 출처: Pinterest)


이 새 교사는 무엇보다 어느 날엔가 새로운 세계의 면모를 창조해야 할 조형능력이 풍부한 젊은이들을 위해 창조된 것이라고 열변을 토했다고 한다. 이 건물은 다리를 포함하여 공방건물, 기술학교, 학생작업관까지 4개의 건물이 연결되어 있다. 골조 건축방법(철근 콘크리트)로 세워진 작업장 건물은 외벽을 유리로 처리했는데, 유리의 특성인 투명함을 표현할 수 있었다. 거의 삼면이 철제 창틀에 유리를 끼운 벽으로 둘러쳐져 가볍게 떠 있어 실체가 없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흰색의 겉칠은 고유한 건물 본체의 평면성과 투명성을 강조한다. 매끈한 직선으로 이루어진 완전히 현대적인 기능주의적 건축은 바우하우스가 더 이상 전통적 공예가 아니라 산업디자인을 가르치는 곳이라는 사실을 시각적으로 확신시켜주었다. 신축 교사는 그 자체가 바우하우스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도 수많은 방문객의 발길을 잡아끌고 있다.


Kandinsky &

Klee


바우하우스의 마이스터 중 이 두 명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바로 현대 추상 미술의 거장인,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와 파울 클레(Paul klee, 1879~1940)이다. 친구 사이기도 했던 이 둘은 바우하우스에서 마이스터로서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칸딘스키는 마이스터 중 학생들로부터 가장 존경을 받은 인물이다. 그는 1921년 12월에 모스크바로부터 그의 제2의 고향과 마찬가지인 독일로 막 돌아왔다. 이듬해 6월에는 칸딘스키가 조형 마이스터로 초빙되어 벽화공방을 담당하게 되었다. 오랜 벗인 클레와 함께 일을 한다는 것이 그를 기분 좋게 했다고 한다. 실제로 당시 칸딘스키는 57세로서 바우하우스의 마이스터 중에서는 가장 연장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열심히 교육에 전념했으며 끝까지 바우하우스와 행동을 같이 했다.


마르셀 브로이어(Marcel Breuer, 1902-1981)가 바실리 칸딘스키를 위해 디자인한 의자로 일명 바실리 의자로 불리며 디자인 아이콘이 되었다.


한편, 파울 클레는 바우하우스의 정신적 지주였다. 그로피우스가 말한 대로 <바우하우스 최고법정>으로서 동료교수와 학생들은 클레에게 최고의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그는 1920년부터 1931년 4월 1일에 바우하우스를 사임하기까지 10여 년간 클레는 그의 생애 중에서 가장 보람 있는 시간을 바우하우스 교육에 쏟았는데 바우하우스에 끼친 그의 영향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라고 한다. 두 사람은 비슷하지만 달랐다. 모두 표현주의자였지만, 당시 바우하우스의 유사 과학적인 분위기에 맞춰 자신들의 주관적 견해를 엄밀히 객관화하려 했다고 한다. 이 시기에 클레의 작품에서는 자연적 모티브가 거의 사라지고 칸딘스키의 화면도 기하학적 추사으로 변모한다. 총서로 발간된 두 사람의 교안은 문제에 접근하는 두 사람의 차이를 잘 보여준다. 가령, 학생들에게 가르칠 형태와 색채의 법칙을 수립하는 것이 둘의 과제였는데, 칸딘스키가 연역적으로 그 법칙을 도출하려 한다면, 클레는 자연의 관찰과 체험에서 그것을 귀납했던 것이다.


3편에서 계속됩니다.


정진욱 Chung Jinw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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