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여행] 바우하우스 part1

익숙하면서도 낯선 바우하우스의 역사 제1편

by 에세이 매거진


애플의 수석 디자이너 조나단 아이브는 디터 람스의 디자인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모던 디자인의 출발점인 바우하우스를 이해하기 위해 그 탄생과 발전 과정을 살펴봅니다.


지금 우리들의 손에는 아이폰이 있다. 1919년 독일 청년들의 손에는 작은 팸플릿이 있었다. 그 표지에는 첨탑으로 이뤄진 고딕 교회당과 3개의 별이 빛나고 있었다. 그 내용이 궁금해졌다. 표지를 넘겨보니 다음과 같은 선언문이 보인다.


바우하우스 선언문(Bauhaus Manifesto, 1919)과 목판화 표지 (이미지 출처: chrismullaney)


모든 조형미술의 궁극적인 목표는 건축에 있다. 그러나 오늘날 미술은 고립상태에 있다. 미술이 이와 같은 고립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모든 공예가들과의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모든 미술가들에게는 공예의 숙련이 필수적이다. 그 속에 창조적 상상력의 근원이 있는 것이다.
(발터 그로피우스의 «바우하우스 선언문» 중에서)


어바웃

바우하우스


바우하우스는 1919년 독일의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 1883-1969)가 설립한 조형 학교이다. 최초에는 독일 바이마르에 세워졌으나, 여러 사건들을 겪으며 그 장소를 이동하게 된다. 지금은 바우하우스라는 단어 자체가 모던한 산업 디자인의 대명사가 되어 버렸지만, 본래는 독일어 ‘Bau(짓다)’와 ‘Haus(집)’의 합성어이다. 이 말은 <건축의 집>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이름에서 엿볼 수 있듯이 바우하우스의 주된 이념은 건축을 주축으로 삼고 예술과 기술을 통합하려는 것이었다.


1919년 독일 바이마르에 설립되었던 최초의 바우하우스 공식 문장 (이미지 출처: Wordpress)


글의 시작과 함께 언급했던 바우하우스 강령의 표지에는 이러한 이념이 잘 나타나 있다. 파이닝거가 제작한 목판화에는 세 개의 별과 그 아래의 세 개의 첨탑이 있는데, 각각 건축가, 조각가, 화가를 상징하며 그것들이 모여 하나의 성당을 이루고 있다. 그로피우스는 당시의 예술의 자율화를 반대하고 모든 미술 작업을 건축으로 통합하려고 했던 것이다. 한편 중세의 건축직인 조합을 의미하는 ‘바우훗테(Bau-hutte)’라는 말이 있는데 아마도 그로피우스는 그것을 현대적으로 바꾼 것이 아닌가 한다. 실제로 바우하우스는 중세의 ‘공방(hutte)’처럼 협동 작업이 현대적 형식으로 재현된 일종의 길드 조직이었다고 한다. 이미 모든 물건을 손이 아닌 기계로 생산하기 시작한 시대에, 바우하우스는 기술적으로 완벽할 뿐만 아니라 예술적 형태미까지 갖춘 디자인을 양산하기 위한 최초의 디자인 교육 시스템이었던 것이다.


바우하우스의

아버지


바우하우스 하면 가장 먼저 그 창립자인 그로피우스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바우하우스를 논할 때 페터 베렌스(Peter Behrens, 1868-1940)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페터 베렌스(Peter Behrens, 1868-1940)가 1908년에 디자인한 독일 AEG社의 전시 카탈로그 (이미지 출처: Pinterest)


그는 세계 최초의 산업 디자이너이자 바우하우스의 주요 인물인 발터 그로피우스와 미스 반 데어 로에(Miesvan der Rohe, 1886-1969)의 스승이기도 하다. 1909년에 베렌스는 AEG라는 당시 가장 큰 전기회사의 일을 맡아 공장의 건축을 포함해서 대량 생산제품 모델을 설계했으며, 카탈로그 및 포스터 등의 광고 인쇄물까지도 제작했다. 그의 제자인 그로피우스는 뮌헨 공과대학과 베를린 공과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하고 당시 베를린에서 중견 건축가로서 활동을 하고 있었던 베렌스의 조수로 일했다. 이러한 이력만 보더라도 그는 분명 베렌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어쩌면 바우하우스의 간결하고 모던한 디자인 양식이 그로부터 계승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예술과

기술


앞서 언급한 것처럼 바우하우스의 주된 이념은 건축을 주축으로 하는 예술과 기술의 통합이었다.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교육 시스템에서 공방의 공예교육이 가장 중추적이었으나, 공방 교육을 받기 전 모든 도제들은 예비교육(1년)을 들어야만 했다. 예비과정은 곧 기초 조형교육이었으며 창의력 함양, 참신한 조형활동을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예비과정은 요하네스 잇텐(Johannes Itten, 1988~1967)이 맡았다. 그는 동양철학에 심취하였고, 수업시간에 본인이 개발한 체조를 실시할 정도로 독특한 교육 방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예비과정을 맡았던 마이스터 요하네스 잇텐(Johannes Itten, 1988~1967)은 스스로 디자인한 옷을 입었다. (이미지 출처: Wikipedia)


예비교육(1년)을 마친 도제들은 공방의 공예교육과정(3년)을 거친다. 도제들은 각 공방에서 수업을 들었는데, 이때 교수라는 호칭 대신, ‘마이스터(Meister)’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우리말로는 ‘명인’ 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주목할 점은 당시 바우하우스의 교육은 공방의 실습과 형태의 연구라는 두 갈래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따라서 각 공방은 원칙적으로 두 명의 마이스터로 구성되어 있었다. 도제들은 공방에서 공작교육과 형태교육(3년), 즉 기술과 예술을 배웠으며 이 모든 것이 그다음 단계인 건축교육으로 도달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그들은 건축을 위한 예술과 기술의 통합으로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2편에서 계속됩니다.


정진욱 Chung Jinw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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