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랑 바르트의 미학
하루에도 수십 장의 이미지를 접하는 우리는 형태와 색에 길들여지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만져보지 않고서는 놓치기 쉬운 질감 또한 그 대상이 가진 아이덴티티를 결정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텍스트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고 말하는 모든 생각과 관념들은 텍스트를 통해 정리되고 전달됩니다. 예술에서는 텍스트와 텍스처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살펴봅니다.
얼마 전 조셉 코수스가 내한해 «The Cultural Life of a Text in Public, Some Aspects, for Seoul»을 주제로 강연을 했다. 그는 제작 과정과 아이디어를 중시하는 개념미술을 탄생시킨 사람 중 한 명이다. 그의 작품을 설명하는데 있어 텍스트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오직 텍스트만이 그의 아이디어를 전달한다. 텍스트는 아이디어를 담는 그릇이라기보다 아이디어 그 자체로서 형상화된다.
코수스가 자주 인용하는 작가 롤랑 바르트는 텍스트에 대한 흥미로운 담론을 남겼다. 그의 사유는 ‘저자의 죽음’이라는 도발적인 선언에 함축되어 있다.
사실 저자(author)라는 말 자체는 이미 권위(authority)를 내포하고 있다. 우리는 흔히 독서에 하나의 해답만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에서 벗어나는 순간 독서는 수동적인 글 읽기가 아닌 능동적인 글쓰기로 전환된다. 의미 해석의 재창조를 통해 비로소 작품은 즐거움의 공간, 즉 텍스트가 되는 것이다.
한편 미술사에서 촉각은 시각과 청각에 비해 오랫동안 소외됐었다. 코수스가 텍스트를 차용하면서 형과 색에 국한된 미술의 지평을 확장했다면, 시각에서 촉각으로 아예 감각의 차원을 옮겨버린 회화도 있다. 가령, 프란시스 베이컨의 작품 속 소위 ‘기관 없는 신체’로 불리는 이미지들처럼 말이다. 관객은 그것이 무엇인지 지각하기도 전에 본능적으로 감각이 먼저 반응한다.
사실 일찍이 텍스트는 우리의 오감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시각, 청각, 촉각은 물론이고 심지어 후각까지도 포함된다. 그 단서는 다음의 텍스트 속에 있다.
며칠이 지난 뒤에 우리는 습자를 배우게 되었다. 그것은 읽기보다 훨씬 즐거웠다. 우리는 제각기 필통과 많은 종이를 받았고, 맨 처음으로 먹 가는 것을 배웠다. 벼루의 오목하게 들어간 곳에 물을 붓고 손가락만한 굵기의 먹을 물이 기름처럼 될 때까지 갈았다. 먹 냄새는 향기로웠다. 그다음 우리는 큰 붓으로 한 획, 한 획을 ‘습자책’에 따라 썼다. 그러기에는 여간 참을성이 없어선 안되었다. (이미륵, 전혜린 옮김, «압록강은 흐른다», 범우사, 19면, 2014)
당신에게 텍스트는 무엇인가. 그리고 텍스처는 무엇인가. 반드시 미술관에서 찾을 필요는 없다. 전자기기 속에서 잠시 빠져나와 주위를 둘러보자. 수많은 텍스트와 텍스처가 도시 전체를 뒤덮고 있다. 코수스의 강연이 끝난 후 그에게 건네받은 명함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투명한 트레싱지에 위에 새겨진 명조체의 텍스트는 그 뒤로 펼쳐지는 세상과 겹쳐지며 또 다른 작품을 만들었다. 어쩌면 텍스트와 텍스처는 지금 우리와 가장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
글 정진욱 Chung Jinw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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