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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 늘 Sep 01. 2021

사랑 덩어리 -“코, 코, 눈”-

# 두 코.  -‘같이의 가치’와 ‘사람’

# 두 코.  -‘같이의 가치’와 ‘사람’



# 두 코. -'같이의 가치'와 '사람'


하루는 새벽에, 날이 새도록 엄마와 수다를 나눈 적이 있었다. ‘어떻게 살면 좋은 것인지, 사람들이 그렇게 운운하는 소위 ‘잘 사는 삶’은 무엇인지…’ 나는 고민이 많았다. 그 고민에 대해 돌아오는 엄마의 응답은 의외로 복잡하지 않았다. 두 가지로 축약할 수 있다. 하나는, 사람들과 ‘같이’의 삶, 또 다른 하나는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애(愛)’이다. 마지막으로, 매우 인상적인 말씀을 하나 남기셨다. 


-“하늘아, 살면서 사랑받기를 바라지 말고, 아낌없이 사랑해.”– 


사랑하는 것만큼 끝이 없고, 순환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이야기를 나는 가슴에 새겼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는 ‘10대의 나’에게, 엄마는 정확히 큰 숙제를 던져 주셨지만… 나는 ‘사랑’이라는 말씀이 좋았다. 


하지만, 사람들과 소통하며 ‘같이’ 살기 위해서 ‘애(愛)’는 분리할 수 없는 것이라는 대화를 나누며, 막막한 느낌을 받았다. 나는 가족과 지내면서, 그동안 ‘같이’의 기쁨과 가치를 뚜렷이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애써 의식하지 않아도 나를 감싸고 있는 일종의 ‘기류’였다. 그러나 ‘그것이 사회로 나아가, 여러 공동체 속에서 동일하게 적용되고 실현될 수 있는 부분인가’라는 생각에는 약간의 의구심이 섞인 두려움이 있었다. 사회 공동체 내 ‘같이’의 중요도와 가치를 모르는 것이 아니다. 다만, 문제는 나와 누군가가 ‘같이의 삶’을 그릴 수 있으려면, 나 혼자만의 생각과 실천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언어 그대로, ‘같이’는 나 홀로 형성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다. 사람들과 내가 사랑을 기반으로 소통하고, ‘같이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역시 ‘그들의 몫’도 함께 필요한 것임을 말한다. 한쪽으로의 치우침 없이 ‘균형’과 동시에 ‘조화’가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나의 몫만으로는 한계가 있지 않을까?’라는 고민에서 나는 한번 더 멈춰 있는 듯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손을 놓고 있고 싶지는 않았다. 공동체의 구성원에게 ‘같이’의 힘을 ‘설득’하 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을 먼저 행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인지하게 하여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방향을 떠올렸다. 내가 조금이라도 움직이면서 주체적으로 ‘애(愛)’를 실천하자는 마음은 단단해졌다. 시간이 오래 걸릴지,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알 수 없지만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고, 집중하는 것에 뜻을 두는 것이다. 핵심은 ‘소통’에 있다. 인간관계의 경험에 비추어보면, 각각의 사람마다 소통의 경로는 다양하다. 성격, 가치관, 관심사 등등에 따라 내용과 강도가 달라진다. 사람 별 조합에 따라서도 방식은 천차만별이다. 그중 변하지 않는 것은, 가장 중심에 두는 ‘존중’이다. 존중은 사랑으로부터 가능하며, 그 사람의 말과 상황에 ‘경청’함으로써 진실된 소통은 고개를 내밀 수 있을 것이다. 경청은 그 사람의 입장에서, 그 사람의 생각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초석이 된다. 


‘같이 살아가는 것’, 그 안에는 여러 미덕이 담겨 있다. 단 한 사람 혹은 한 쌍의 사람들이라도 이에 대해 깨어 있는 의식을 갖고 있다면, ‘존중’은 ‘상호 존중’으로, ‘배려’는 상호 배려’로, ‘경청’은 ‘상호 경청’으로 발전할 수 있다. 여러 쌍의 사람들이 복합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면, 그 층은 더 두터워진다. 이처럼 ‘상호-‘라는 접두사가 미덕에 붙을 수 있다면, 공동체는 긍정적으로 존속할 수 있다. 그 변화는 개인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넘어, 넓은 범위의 ‘애(愛)’를 공동체에 확장하는 것에 달려 있다. 결국, ‘사랑받기를 바라지 말고, 사랑하라는 것’은 내가 누군가에게 존중받고, 배려받고, 이해받기를 가만히 바라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대신에 내가 ‘항상 먼저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하고, 이해하면서’ 살기를 바라신 것이다. 


사실 부모님께서는 단 한 번도 나에게 ‘강제적인 교과 공부’를 말씀하신 적이 없었다. 10대의 자녀를 키우는 집이라면, 흔하게 나온다는 공부 잔소리가 들려오지 않은 것이다. 대신 나는 ‘나’라는 사람과 ‘친구’,’ 가족’, ‘선생님’과 같이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 심혈을 기울일 수 있었다. ‘국어, 수학, 영어…’라는 주요 교과목보다 나는 ‘사람 됨’이라는 말을 더 많이 들어왔다. ‘나’라는 사람 자체가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인지, 그 ‘사람’이라는 큰 틀에 대한 고찰이 나에게는 최우선일 수 있었다. 


어쩌면 영단어를 조금 못 외우고, 시험지에서 문제를 틀리는 것은 삶을 거시적으로 바라볼 때, 치명적인 오점이 아니었다. 부모님은 학교에서 진도 나가는 공부도 그 자체로 중요히 여기셨지만, ‘삶’을 공부하는 과정을 더욱 중시하셨다.  인생에서 벌어지는 ‘특정한 결과’, 혹은 사소한 실수들에 일희일비하지 않을 것을 전해주려 하셨던 부모님의 마음을 나는 가슴 깊이 존경한다. 먼저 올곧게 잡혀 있어야 하는 건, ‘나’라는 사람이었다. 내가 ‘삶’을 생각하고, ‘사람’에 대해 고민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 지 않았다면… 나의 머리는 채워졌을지 몰라도, 마음이 이토록 충만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많은 지식의 습득과 활용보다도, “본질적으로 사람이- 사람과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한순간도 소홀히 하지 않는 마음가짐과 자세.” 그것은 내가 겪어온 어떤 고등 교육기관에서도 받기 어려운 교육이었다. 내가 조금 더 따뜻하고 세심한 마음을 갖고 살도록, 세상을 넓게 바라보며 사람을 품을 수 있는 존재가 되도록 말이다. 


특히, ‘고마움, 감사함’과 ‘미안함, 죄송함’을 적절히 표현해야 하는 때를 놓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체득했다. 사람들과 지내면서 다양한 상황과 현상을 마주한다. 그중 나의 잘못을 인정하고 먼저 사과의 뜻을 밝히는 것을 반드시 지켜왔다. 또한 ‘힘’과 도움을 받고, 좋은 감정과 생각을 선물 받았을 때, ‘너무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에 인색하지 않은 나를 마주한다. ‘표현’에 앞서 내 마음이 진짜 그렇게 감응하는지를 살펴보고 노력하는 것이 필요했다. 형식적인 고마움과 미안함의 인사는 공허하기만 하다. 사람에게 실한 나의 감정과 생각을 전달하는 가운데, 상대에 대한 나의 심정을 넓히려 애썼다. 


‘주고-받음’은 하나로 연결되어있다. 끝이 없는 순환이다. 사람 사이의 ‘사랑의 선순환’이 너무나 이상적인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고 잡히지 않아 어렵다. 스스로에게 ‘사랑’이 노력으로 실천할 수 있는 개념인지 질문할 용기조차 나지 않은 적이 있었다. ‘애(愛)’에 대한 나의 불확실한 믿음이 점차 변화한 것은, ‘가족’이 언제나 내 곁에 있어주었기 때문이다. 사랑 앞에 망설임이 없는, 적극적인 식구들은 내가 ‘사랑’에 대한 막연하고 어려운 감정을 밀어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마음 편히 울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주고, 나의 선택과 자유를 존중해주었다. 흔들릴 때에는 먼저 손을 잡아주고, 내가 나의 길 위에서 당당하게 걸어 나갈 수 있도록 뒤에서 지켜봐 주었다. 쉽게 보면, ‘좋은 것은 혼자 갖는 것이 아니라 나눠 주고 싶고, 맛있는 건 같이 먹고 싶은’ 마음이 사랑이다. 아마도 우리 가족의 생명력은 이러한 마음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생명력을 타인과 살아가는 ‘나’에게도 빼놓을 수 없다. ‘살아있기 위해 애쓸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격언이 여전히 추상적이고, 알다 가도 모르겠지만… 나는 조금씩 그 의미를 ‘사랑’으로 그려볼 수 있게 되었다. 


‘당장 앞에 놓인 작은 것들에 가려져, 자칫 큰 것을 놓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사는 것’이 우리 가 족의 ‘모토’이다. 삶의 중요한 가치는 단순히 어떤 성과가 아니라는 굳은 신념이 나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20여 년의 세월 동안 나는 무의식 중에, ‘사람이 먼저다.’라는 문장을 중심에 새겨 놓고 있었다. 줄곧 나의 상태 메시지는 -‘좋은 그림을 그리는 좋은 사람’이-이다. 아직 ‘좋음’이 어떤 형태로,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이는 답이 없는 것으로, 유연하게 연구하고 사유하고 싶다. 한편, 위 문장의 핵심은 ‘좋음’에 있지 않다. ‘말의 배열 순서’가 아니라 ‘큰 덩어리-관형어-의 수식 관계’에 있다. 유심히 살펴보면, 그림의 꾸밈을 받는 건 ‘사람’이다. 내가 사랑하는 ‘그림’도 ‘사람’이라는 존재와 가치보다는 후순위인 것이다. 


“결국, 먼저 ‘좋은 사람’으로 ‘나 자신’이 있은 후에, 좋은 그림도 나올 수 있다.” 
“모든 생각과 행동은 ‘그 사람’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또한 “지극한 ‘애(愛)’로 그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존중할 수 있을 때, ‘같이의 삶’은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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