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방을 위한 말일까? 나를 위한 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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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속한 부서는 유독 변화가 많았다. 항상 회사 부서 개편의 중심에 있었고 그 과정에서 많은 분들이 회사를 떠났다. 지난 10년 동안 수많은 송별회를 했고 그렇게 30명이 넘는 분들과 헤어져야만 했다. 송별회의 분위기는 늘 묘하다. 어떤 분은 퇴사의 순간에 정든 회사를 떠나는 것에 진한 아쉬움을 표현하기도 했고, 어떤 분은 새로운 직장에서의 기대감 때문인지 무척 홀가분해 보였다. 저마다 다른 느낌의 퇴사의 순간이었지만 그때마다 내가 했던 말이 있다.
“연락드리겠습니다. 언제 식사 한 번 하시죠.”
하지만 이후에 식사를 한 경우는 십 분의 일도 채 되지 않았다. 나는 실제로 연락하지도 않았고 연락할 의지도 없었으면서 왜 저런 뻔한 거짓말을 했던 것일까?
누구를 위한 거짓말이었을까?
처음에는 상대방을 위한 말이라고 생각했었다. 정든 회사를 떠나는데 하루 8시간씩 얼굴을 맞대며 함께 일했고 하루에 두 끼 이상의 식사를 같이했던 동료들이 그냥 “수고하셨습니다.”라고만 인사를 하면 너무나 섭섭하고 허탈해할 것만 같았다. 그분들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고자 “언제 식사 한 번 하시죠”라는 따뜻한 거짓말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어느 순간 깨닫게 되었다. 상대방이 아니고 나 자신을 위해서 했던 말이었다는 걸. 냉정한 회사라는 곳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들을 쿨하게 떠나보내는 인간미 없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언제 식사 한 번 하시죠.”라는 말을 이용해 ‘저 이렇게 따뜻하고 인간미 넘치는 사람입니다.’라고 보이고 싶어 빈말을 했던 건 아닐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진심이 담겨 있지 않은 무의미한 말
‘밥 한 번 먹자'는 한국사람이 가장 자주 사용하는 인사치레 중 하나이다. 누군가는 이 말에 대해 '서로 친근감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말. 정이 많은 한국사람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 말'이라고 했다. 과연 그럴까?
대학생 때 별로 반갑지 않은 과 동기를 우연히 만나 그 상황을 빨리 벗어나고자 말했던 "언제 술 한 잔 해야지?", 회사 엘리베이터에서 별로 안 친한 동기를 만나 할 말이 없어 내뱉은 "잘 지내? 밥 한 번 먹어야 하는데." 등등. 이 말에 어느 정도의 진심이 담겨 있었을까?
결국 진심이 없는 저 말들은 나의 인간관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분들이 회사를 떠난 후에 나와 다른 회사, 다른 환경에서 지내다 보니 서로 빠른 속도로 잊혀 갔고 또 멀어져 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연락이 끊긴 사람들 중에는 소중한 인연들도 있었다. 나는 앞으로 인연을 이어 나가야 할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모두에게 ‘언제 식사 한 번 하시죠.’라는 의미 없고 애매모호한 말을 건넸었다.
인사치레 보단 차라리 작별인사를
문득 내가 첫 회사를 퇴사했던 때가 생각이 났다. 무척 친한 사이라고 생각했던 동기가 한 명 있었는데, 난 그 동기가 당연히 “연락할게. 언제 밥 한 번 먹자."라고 얘기할 줄 알았지만 그 동기의 마지막 인사는 뜻밖이었다. "우리가 이곳에서 친하게 지냈지만 이제 각자 다른 생활이 펼쳐지면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멀어지고 연락하기 힘들 거야. 꼭 더 좋은 곳으로 취업하고.”
당시에는 그 동기가 너무 섭섭하게 느껴졌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면 그 동기 말이 맞았다. 지금까지 내 기억 속 어딘가에 그 동기는 섭섭함으로 남아 있었지만 이제야 난 그 마지막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의 앞날을 진심으로 응원해준 그 한 마디가 고맙게 느껴졌다.
앞으로 빈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다지 연락할 마음이 없는 분들에게는 인사치레 대신 진심을 담아 작별인사를 건넨다. “새로운 곳에서도 잘 적응하시고 성과 내시길 바라겠습니다.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무의미한 '언제 식사 한 번 하시죠'라는 빈말보다는 상대방의 앞날을 진심으로 축복해주는 게 더 의미 있는 한 마디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