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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들산들 Nov 07. 2019

나 자신과 친해지기

철저히 혼자 남겨진 경험

대학교 졸업반 때의 일이었다. 부모님과 핸드폰을 바꾸러 갔는데 사장님이 주소록을 옮겨 주다가


“아드님 핸드폰에 전화번호가 200개가 넘네요. 학생이 200개 넘기 쉽지 않은데.”


라는 말을 했다. 그 당시 나는 이 얘기가 마치 훈장처럼 느껴져 뭔가 뿌듯했다. ‘200명의 인맥을 가진 나’, ‘성공적인 대학생활을 한 나’ 이런 느낌 말이다. 집에서 얌전하기만 한 아들이 200명이 넘는 연락처를 갖고 있다는 사실에 부모님도 약간은 놀란듯한 눈치였다.


완전히 혼자 남겨진 경험


그리고 6개월 후 나는 갑작스럽게 호주로 워킹 홀리데이를 가게 되었다. 호주 멜번에는 아무런 연고도 없었고 홈스테이나 유학원도 정하지 않은 상태로 무작정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멜번 도착 후 백패커에 짐을 풀자 나는 철저히 혼자가 되었다. 생각해보면 그 전에는 철저히 고립된 적이 없었다. 초중고 때는 늘 여러 명의 반 친구들과 뒤섞여 있었고 군대에서는 말할 것도 없으며 대학생 때도 늘 옆에 누군가 있었다. 수업이나 약속이 없다고 해도 집에는 늘 가족이 있으니 철저하게 고립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아무런 연고가 없는 호주에서는 달랐다. 집도 없고 날 반겨주는 가족도 없으며 같이 농구하던 동네 친구들도 없다. 백패커에는 나 말고 외국인 남자가 한 명 더 있었지만 어두워 보이는 인상과 내 부족한 영어실력 때문에 말을 걸 엄두는 내지 못했다.


하루가 지나고 엄청난 외로움이 밀려왔다. 1불이 몹시 귀해 생수도 아껴 마시는 상황에서도 5불짜리 국제전화 카드를 샀다. 부모님께 생존신고를 하고, 외로움을 떨쳐버리기 위해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제일 친한 친구 2명과 통화를 한 후, 전화 카드에 아직 금액이 남아 있고 외로움도 남아 있었지만 나는 전화를 끊었다. 전화 걸만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 주소록에는 200명이 넘는 지인들이 있는데도 말이다. 당시 첫 직장을 6개월 만에 그만두고 무작정 호주로 떠난 상황이라 지인들에게 내 근황을 밝히기가 싫었다. ‘왜 퇴사했어?’, ‘나이가 몇인데 유학을 가?’라는 얘기를 들을 것만 같았다. 결국 200명의 지인들 중에 내가 속마음을 터놓고 얘기할만한 사람은 단 두 명뿐이었다.


무의미했던 인맥들


나는 무엇을 위해 대학교 시절 수많은 술자리를 참석한 걸까? 사실 나는 음주가무를 좋아하지 않는다. 소위 얘기하는 ‘술은 안 좋아하지만, 술자리는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그저 인맥관리를 위해 억지로 술자리에 참석했던 것이었다. 방학 때 과형들이 모인다고 하면 그 먼 종로까지 나가고, 별로 가고 싶지도 않았던 동아리 엠티도 왠지 아웃사이더처럼 보이는 게 싫어 따라갔다. (역시나 별로 즐거웠던 기억은 없다.) 공강 시간에 혼자 매점에 있어도 아무 상관이 없지만, 억지로 친구를 만들어 공강 시간을 보냈다. 사실 나는 혼자 있는 게 편한 내향적인 사람인데도 말이다. 멜번의 어두컴컴한 백패커 침대에 누워 작디작은 노키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그날 밤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먼저 나 자신과 친해질 것


술자리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다른 사람과 억지로 시간을 보내기보단 혼자 음악을 듣는 게 더 힐링이 된다는 것, 배려심 많아 보이지만 나름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결국 타인과의 관계도 나 자신이 바로서야 성공적으로 나아갈 수 있는데, 대학교 시절의 나는 그 부분을 깨우치지 못했다. 내면의 허전함을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채우려고 발버둥 쳤던 것 같다.


호주 워킹 홀리데이를 통해 얻은 건 돈도 영어도 아닌 나 자신과 친해진 것이었다. 1년 동안 대부분의 인맥이 자연스럽게 정리되었고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 억지로 술자리에 나가지도 않고 억지로 친구를 만들지도 않았다. 어떤 모임이든 내가 조금이라도 내키지 않으면 나가지 않았다. 내가 주도적으로 지인들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이끌어 나갔고 소수의 지인에게만 집중하면서 연애도 친구와의 관계도 더 잘 풀려 나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인간관계로 인해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대부분은 그 원인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서 찾는다. 행복한 인간관계를 위해 어떤 사람을 만날지 어떻게 사람을 상대해야 할지 고민하지만, 어쩌면 인간관계의 중요한 첫걸음은 ‘나와 친해지기’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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