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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들산들 Apr 23. 2020

갑과 을은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이미지출처:unsplash@charlesdeluvio]


처음으로 갑을문화를 경험한 건 군대에서였다. 내가 있던 부대는 유독 선후임 서열이 엄격했고 1주일 선임에게도 깍듯이 선임 대우를 해야만 했다. 1주일 먼저 입대한 사람은 후임이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더 심하게 혼냈고, 고작 1주일 차이인데 너무 심한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악랄하게 갑질을 해댔다.


30명 가까이 되는 선임들과 한 내무실에서 생활하며 24시간 내내 그들의 눈치를 봐야 했다. 입대 전에는 정말 눈치가 없었던 나였지만 자대 배치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싸한 분위기를 피부로도 느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렇게 군대라는 곳에서 갑을문화를 경험했다.


전역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전역 소식을 듣고 선임들이 연락을 해왔다. 종로의 한 호프집에서 9~10명의 사람들이 모였고 각자의 추억들을 쏟아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분위기는 매우 화기애애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들 적당히 취해 있었고 군대에서 섭섭했던 일을 얘기하기도 했고 훈련받을 때 힘들었던 일을 얘기하기도 했다. 군대에서는 악랄하기만 했던 선임들도 밖에서 보니 그냥 평범한 동네 형처럼 보였다.


나는 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조금 늦게 입대했었기 때문에 선임들이 대부분 나와 동갑이었다. 그 사람들은 나에게 “이제 사회 나왔으니 편하게 친구처럼 지내자.”라면서 손을 내밀었다. 한 때 내가 떠받들던 사람과 동등한 관계가 되었다는 사실이 나에게 묘한 짜릿함을 느끼게 해 주었다.


갑질의 추억


긴 시간 동안 한 내무실에서 동고동락했다는 것, 사회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특별한 추억을 함께 공유한다는 것, 그리고 같은 나이. 이것만 봤을 땐 우리의 우정은 길게 유지될 것만 같았다. 아버지가 지금도 군대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고 가끔 여행도 같이 가는 것처럼 나 역시 40~50대까지 이 관계가 계속 유지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 모임은 내 예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선임들에게는 갑질의 추억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우리 친구잖아.’라고 했지만 이따금 갑의 모습이 불쑥 튀어나왔다. 누군가 약속 시간에 늦게 되면 “이 XX들 군대였으면 진짜 다 죽는 건데.” 라며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었고 술자리에서 사소한 논쟁이라도 생기면 “예전에 나한테 말도 제대로 못 걸던 놈들이 까불고 있네.” 라며 본인이 우위에 있음을 은근히 과시하기도 했다.


결국 얼마 가지 않아 이 모임은 종결되었다. 선임들의 은근한 갑의 모습이 싫었고 지금 생각해보면 나 역시 후임이었던 친구들에게 은근한 갑질을 했던 것 같다.


아버지는 어떻게 군대 친구들과 지금까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 "저는 군대 친구들과 대부분 연락이 끊겼는데 아버지는 어떻게 지금까지도 친하게 지내요?"
아버지: "다 동기였으니까."

: "그럼 선임이나 후임이었던 사람 중에 지금도 연락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어요?"

아버지: "동기 외에는 한 명도 없지."



꼭 서열을 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몇몇 회사를 방황한 후 서른의 나이에 지금 회사에 신입으로 입사했다. 여자 선배들은 나보다 한참 어렸고 남자 선배들도 대부분 나와 동갑이거나 아니면 나보다 조금 어렸다. 함께 일했던 선배들이 퇴사를 하거나 이직을 하면서 우리의 관계도 애매해졌다. 선배들은 나이 많은 내가 존댓말을 쓰는 게 불편했던 모양인지 각자 다른 회사 소속이 된 이후 처음 만난 자리에서 대부분 "이제 저한테 말 편하게 하세요."라는 말을 했다.


나를 배려해준 그들의 제안이 몹시 고마웠지만 나는 끝내 말을 놓지 않았다. 군대에서 갑을관계였던 선임들과 동등한 관계로의 변화를 시도하면서 실패했던 기억이 내 머릿속을 스쳐갔기 때문이다. 이제 동등한 관계라고 믿고 마음을 연 사람에게서 갑의 그림자를 보는 게 싫었다. 결국 우리는 나이로 서열을 정하지도 않았고 내가 나이가 많다고 해서 갑자기 말을 놓지도 않았다. 애매하지만 적당한 관계로 지내다 보니 지금까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호주 워킹홀리데이 때 여러 친구들을 만났는데 외국 사람들을 처음 만날 때면 서로의 이름을 먼저 물어보지만 한국 사람을 만나게 되면 이름보다 나이를 먼저 물어보게 되었다. 한국 사람들은 서로의 나이를 확인하고 서열과 호칭을 정하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이 놓이는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우리 사회는 서열을 정하는 갑을문화에 너무 익숙해져 있는 게 아닐까? 나이 많은 사람이 으레 밥이나 술을 사야 하고 때론 그걸 빌미로 술자리에서 훈계를 늘어놓는 것까지. 평등한 관계가 되어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는 관계에는 익숙하지 않은 걸까? 학교, 군대, 직장에서의 갑을문화까지. 어쩌면 한국 사회 인간관계의 핵심은 '갑을' 이 두 글자 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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