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관계의 민낯
[사진출처: tvN 드라마 ‘미생’]
같은 부서에 나보다 2년 먼저 입사한 과장님이 있다. 일도 잘하고 연관부서의 평가도 좋았던 그 과장님은 초고속 승진을 했고 팀장님도 그 과장님을 무척 아꼈다. 팀장님은 공식적인 자리에서나 개인적인 자리에서나 틈만 나면 과장님 칭찬을 했고 후배들에게도 과장님을 본받으라고 얘기하곤 했다. 과장님 역시 팀장님에게 깍듯했고 둘의 사이는 이상적인 상하관계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팀장님이 팀원으로 강등되었다. 거래하던 업체에 문제가 생긴 게 원인이었고 일종의 징계성 인사 발령이었다. 그러자 그 총애를 받던 과장님의 태도가 돌변했다. 누가 봐도 너무 티가 날정도로 예전 팀장님을 무시했고, 다른 부서 사람들마저 ‘어떻게 저렇게 사람이 돌변하냐.’며 수군거렸다. 나는 때마침 과장님과 단 둘이 외근을 나가게 되었는데, 과장님은 사람들이 본인에 대해 뒷얘기를 하는 걸 알고 계신 듯 담담하게 말씀하셨다.
“내가 그분께 잘했던 이유는 그분이 팀장이었기 때문이에요. 그 외에 다른 이유는 없어요.”
나는 이 한 마디가 상하관계의 민낯을 여실히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수평적인 관계가 아닌 수직적인 관계인 한국 회사에서는 마음을 터놓은 진실된 소통이 이뤄지기보다는 일방적인 지시가 이뤄지는 것이 대부분이다. 결국 과장님은 사람으로서 팀장님을 좋아했던 것이 아니라, 그저 팀장이라는 직급 앞에 충성을 다했던 것뿐이었다. 3년 동안 함께 일했고 자신에게 한없이 깍듯했던 부하 직원이 한순간에 돌변하는 걸 보고 팀장님은 무슨 기분이 들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장님이 냉혈한이라고 뒤에서 수군댔지만, 나는 결코 과장님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과장님의 행동이야 말로 한국 회사원들에게 필요한 마인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우리는 회사에서 직장상사로부터 일방적인 지시를 받으며 일하고 때론 자존심이 상해하며 스트레스를 받기도 한다. 마치 본인의 인격이 무시당하고 자존감이 한없이 낮아지는 기분에 퇴사를 결심하기도 한다. 하지만 회사에서 지적당하고 혼났다고 해서 나라는 인격 자체가 무너지는 게 아니고, 그저 팀장이라는 직급 앞에 업무 지시를 받은 팀원일 뿐이다. 팀장-팀원의 비즈니스 관계일 뿐 인간-인간의 관계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다.
디지털조선 <직장인 스트레스 일보다 사람, 해소 방법은?> 기사에 따르면 한국 직장인의 스트레스 1위는 51.2%로 대인관계, 2위는 24.8% 업무 스트레스, 3위는 11.2% 야근이었다. 반면 www.stress.org <Are you experiencing workplace stress?> 에 따르면 외국 직장인의 스트레스 1위는 46%로 업무 스트레스(과다한 업무량), 2위는 28%로 인간관계, 3위는 잡다한 업무가 20% 이었다.
우리가 회사에서 상처를 받는 건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큰 기대를 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회사가 인간적일 것이라는 기대, 직장상사가 학교 선배처럼 나를 따뜻하게 챙겨줄 거라는 기대말이다. '내가 비록 업무적으로 실수를 하더라도 상사가 인간적으로 용서해 주겠지'라는 생각이랄까? 외국 직장인들의 스트레스 1위가 대인관계가 아닌 건 착한 사람들만 있기 때문이 아니라 성과가 나지 않으면 바로 매정하게 내치는 분위기 속에서, 직장상사에 대한 기대가 아예 없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