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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들산들 Dec 07. 2019

택배 기사님이 주신 껌 한 개의 의미

6개월 전, 회사에서 중요한 제안전을 진행하게 되었다. 입사 후 처음 단독으로 진행하게 된 제안전 이었기 때문에 한 달을 꼬박 제안전에 매달렸다. 안 그래도 바쁜 시기인데 갑자기 제안전을 진행하게 되어 한 달 내내 주말에도 출근하는 ‘월화수목금금금’의 생활이 계속 되었고, 내 마음속에는 ‘이 일만 끝나면 퇴사하고 만다’라는 생각 뿐이었다. 제안전 전날 부서장님에게 최종 보고를 하기 위해 샘플을 체크하고 있는데 하나가 안 보였다. ‘어 이상하다? 분명 있었던 것 같은데.’ 순간 등에 식은땀이 흐르고 호흡이 가빠져오기 시작했다. 오후 5시 거래처에 다급히 전화를 걸었다.


나: “사장님 12번 최종 샘플을 안 보내 주신 것 같아요. 빨리 찾아보세요.”

사장님: “다 보냈을 텐데요.”

나: “다 찾아봤는데 없어요. 분명 사장님 회사 어딘가에 있을 테니 빨리 찾아보세요.”

역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었다. 5분 후 사장님이 힘없는 목소리로 전화를 하셨다.

사장님: “이거 우리가 안 보내고 있었네. 미안해서 어쩌죠?”

나: “시간 없으니 지금 빨리 퀵으로 보내주세요. 저 한 시간 후에 보고 해야 해요.”


한 시간 후 택배 기사님이 ‘로비 도착했습니다.’라는 문자 메시지를 보내셨다. 이 택배 기사님은 예전에도 여러 번 우리 회사로 물건을 배송해주셨지만, 외부사람이 사무실에 올라올 수 없는 회사 구조상 항상 1층 로비에 물건을 맡겨 두고 그냥 가셔서 직접 얼굴을 본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날은 바로 샘플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1층 로비에 내려가서 직접 물건을 픽업하기로 했다.


내가 예상했던 그림은 피로에 지쳐 있는 기사님이 무표정한 모습으로 물건을 건네고, 나 역시 무표정한 모습으로 물건을 받았다는 사인을 하고 바로 돌아서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내가 로비에 내려가자 택배 기사님은 너무 반가운 목소리로 “OOO 님이시죠? 이제야 얼굴을 보네요. 맨날 문자만 보내다가.” 라고 하셨고, 나는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약간은 당황했다.


나:”아 네. 제가 늦은 시간에 택배 불러서 죄송해요.”

기사님: “아니에요 저녁은 먹고 일하는 거예요?”

나: “급한 일이 있어서 아직 못 먹었어요.”

기사님: “아이고 어쩌나. 제가 뭐 드릴 건 없고 이거라도 드릴게요.”

 

하며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해진 껌 하나를 꺼내 주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들뻘 되는 사람이 저녁도 못 먹고 일하는 걸 보고 젊은 시절의 본인이 떠올라 짠하다는 생각이 들어 어떻게든 힘이 되어 주고 싶어 갖고 계시던 껌을 꺼내 주셨던 것 같다. 너무나 보잘것없고 흔한 껌 한 개였지만, 나는 이 껌이 무척 따뜻하고 소중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 택배 기사님의 마인드가 부러웠다. 그분도 젊은 시절에는 나 같은 직장생활을 하셨겠지. 그러다 퇴직 후 어느 은퇴자들과 비슷하게 생계를 위해 지하철 택배일을 시작하셨을 것이다. 하루에 수십 건의 택배를 처리하며, 때로는 회사나 아파트 경비들에게 무시를 당하기도 하고, 길을 헤매다 배송이 늦어 고객들에게 클레임을 받기도 하셨을 것이다. 그런 힘든 일상 속에서도 처음 만난 나에게 활짝 웃으며 따뜻한 말을 건네주실 수 있는 기사님의 마음의 여유가 부러웠다. 불과 10분 전까지만 해도 ‘이일만 끝나면 퇴사하고 만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물건을 받고 올라가면서 택배 기사님의 따뜻함 때문에 내 마음 한 구석에서 따뜻함과 긍정의 마인드가 피어나고 있었다.


그 택배 기사님이 주신 따뜻함 때문일까? 그 날 보고도 무사히 마쳤고, 그 다음날 제안전도 성공적으로 끝났다. 6개월이란 시간이 지났지만 지금도 가끔 그 택배 기사님이 생각이 난다. 처음 보는 날 보고 환하게 웃어주시던 그 미소, 수줍게 건네주시던 꼬깃꼬깃한 껌. 가끔은 그런 기억들이 있다. 시간이 지나도 희미해지기보다는 더 선명해지는 기억들 말이다. 6개월이 지난 지금도 그 따뜻함이 남아 있는 것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따뜻함을 선물해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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