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윤은 많은 연애를 경험했는데, 그가 특별히 매력적이라거나 인기가 많아서가 아니라 관계가 깊어질 듯 하면 도망쳐버리는 그의 습관때문이었다. 그는 겉과 속이 달랐고 진심이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읽기 쉬운 감정만을 좋아했다. 관계가 깊어지면 그는 속이 뒤틀림을 느꼈고, 진심에 다가가지 못했으며, 감정은 읽을 수 없는 외국어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연애의 즐거움과 달콤함만은 좋았다. 이도윤은 연애의 휘핑크림만 먹어치우고 어쩌면 씁쓸할수도 있는 관계의 진한 커피는 맛보지 않는다. 그런 전략은 꽤나 편리했다. 도망치고, 다시 도망치고, 어디론가 도착했다가 다시 도망치는 연애.
그가 헤어짐을 말할 때 쓰는 전략은 우울증이 있다는 고백이었다. 관계가 깊어질만하면, 즐거움과 달콤함이 사라지고 점점 씁쓸한 커피가 느껴질때쯤, 대단히 중요한 비밀을 고백하듯 분위기를 잡고 상대에게 말하는 것이다.
‘나 사실... 심각한 우울증이 있어... 하루에 약을 네 알씩 먹고 있어... 더 이상 널 만나는 게 너무 미안해...그만 만나자...’
그러고는 형형색색의 알약 몇 개를 보여주면 대부분은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조용히 떠나갔다. 아무리 질긴 인연이라도 몇주 후 의례적인 마지막 안부문자 정도로 관계를 정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더러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아.. 내가 곁에서 도와주고 지켜줄게.. 말해주어서 고마워..’
이런 반응은 이도윤이 가장 꺼리는 것이었다. 관계를 정리하는 것도 쉽지 않을뿐더러 어떤 죄책감이 들기 전에 어서 감정의 문을 닫아야 했다. 정을 떼는 확실한 방법을 그는 알고 있었다. 아무렇게나 욕지거리를 하며 물건을 집어던진다. 감정조절이 되지 않는, 때로는 우울하고 때로는 폭력적인 사람이다, 라고 광고하고 나면 깔끔하게 떨어져 나갔다.
이런 연애도 쉰 번이 넘어갈때쯤 완전히 그만두었다. 휘핑크림도 달콤하지 않다- 진한 무감각의 상태가 그를 덮쳤다. 이도윤은 이제 서른 여덟이 되었다.
약속도 없는 주말이었다. 이도윤은 정오가 되도록 늦잠을 자고 반쯤 깨어나 핸드폰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때 그에게 전화 한 통이 왔다. 엄마였다.
“아들, 밥은 챙겨 먹었니?”
“네 대충 먹었어요.”
이도윤은 거짓말을 했다.
“구청에는 별 일 없고?”
“뭐 별일 없죠.”
“이번 주말에 집에 좀 와야겠다”
도망치듯 나온 집은 이도윤에게 유배지처럼 느껴졌다. 가끔 들르는 집을 형벌처럼 생각했다. 정이 넘치는 가족을 연기해야 할 것 같은 불편함이 그는 싫었다. 명절에 들러 건강함을 연기하는 일도 그만둔지 오래였다. 엄마도 이런 이도윤을 처음에는 안쓰러워했고 시간이 지나가 원망했으나 이제는 포기했다. 그런 엄마가 그를 집에 오라고 했다. 이도윤은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쇠를 씹은 듯 인상을 찌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