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가는 해외여행을 좋아한다. 그럴 때 꼭 하는 일이 있다. 조그만 노트와 펜을 들고 술집에 간다. 그리고 평소라면 사람에게 쏟아부었을 술주정을 노트에 하는 것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 곳에서 말을 적는다. 그러면 세상에 나 혼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적어내는 말들은 대부분 시덥잖은 이야기. 어렸을 때 기억이나 무심코 넘겨버렸지만 이제 이유를 알 수 있는 감정들, 어쩌면 분기점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여기는 사건들이다.
혼자 기차를 타는 것을 해 본 적 있다. 예전에-지금도 운행하는지 모르겠다.- 청량리에서 강릉으로 가는 기차를 탄 적이 있다. 강원도를 굽이굽이 돌아 가는 무궁화호 열차였는데, 무려 여섯시간이 걸렸다. 그 때 책을 읽었다. 문학동네에서 나온 김영하판 [위대한 개츠비]였다. 초월번역이 많다고 생각했다. 더러 축약도 있었고 극화도 있었다. 재미있게 읽었지만 그 다음부터는 소설을 읽을 땐 온전한 번역본을 찾아 읽는 습관이 생겼다. 그렇게 기차를 타고 가서 다시 기차를 타고 돌아올 땐 잠을 잤다.
이별 뒤에 느끼는 감정도 풍화를 겪는다. 처음 이별은 심장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다음 이별은 복부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그 다음 이별, 그 다음 이별.. 횟수가 거듭된 어느날 각질이 떨어진 것 같았다. 심장을 나누었다가 복부를 나누었다가 급기야 각질을 니누는 연애를 했을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경이와 호기심은 한 번 무너뜨리면 다시 세우는 것이 쉽지 않다. 그것들이 무너진 자리는 권태가 남는다.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동기나 의지, 계획이나 목표라기보다 경이와 호기심일 때가 많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아이들은 계획하지 않고도 수많은 움직임을 만든다. 경이와 호기심이 가득한 채. 원초적 인간은 그렇게 움직인다. 의지와 계획으로 움직이는 것이 성인의 영역이라지만 나는 아직 경이와 호기심을 꿈꾼다. 지독한 권태와 나태 속에서도.
혼자 말이 통하지 않는 곳에 가서 취한 채 넋두리를 늘어놓고 싶다. 모르는 사람들끼리 당분간 모여 어디론가 이동하는 동안 책을 읽고 싶다.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의 소설을 정확히 읽고 싶다. 심장을 뜯어주고 복부를 내어주는 연애를 하고 싶다. 지독하게 혼자서 무너지고 싶다. 이런 것들에 호기심이 생긴다. 서서히 벽癖이 되어가는 취향이 단순히 권태의 반작용이라면 안타깝지만.
그러므로 아직 살아 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 경이와 호기심을 위해. 단 한번의 생이라면 그 모든 진액을 쥐어짜기를. 무엇이든 지독하게 흘러나오기를. 아플 땐 이별보다 고통스럽고 혼자일 땐 쓰레기처럼 혼자이며 무너질 땐 흔적도 남지 않기를. 이야기를 들을 땐 뇌를 이식한 것처럼 빨아먹기를. 온 신경을 곤두세워 놀라워할 경이와 잠을 잘 수 없는 호기심이 나를 덮치기를. 나이드는 건 이러한 경이와 호기심을 조용히. 혼자서. 기다리는 것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