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 사이는 이해하기도 어렵고 예측하기도 어려운데, 특히 연인 사이는 더욱 그렇다. 완전히 남남인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시간을 어떻게 보내왔는지도 모를 두 사람이, 한 공간에서 우연히 만나,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가 되어가는 일은 가끔 세상의 오류처럼 보일 지경이다. 합리적으로 흘러가지 않는 세상의 일이 있다면 그 첫 번째 항목은 단연 연애가 될 것이다.
꿈을 꾸다 보면 언제부터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몰라도 어떤 황당한 상황에 속박되어 있더라도 완전히 납득하는 순간이 있다. 그 꿈도 그랬다. 유년시절, 집을 오가는 거리였다. 나는 어른이 되어 그 거리를 해맸다. 그 곳에서 어린 시절의 친구도 만나고 대학시절 교수님도 만나고 고양이도 만난다. 지금의 자아에서 벗어나지 않은 내가 유년시절의 거리를, 시차가 뒤섞인 사람들을 만나 거니는 꿈. 말도 안되지만 완전히 납득해버린 꿈의 순간을 지나고 잠에서 깨면, 내가 누군지 이곳이 어디인지 알아차리는 데 얼마간의 시간이 걸린다.
연애도 그렇다. 처음 시작이 언제부터였는지 명백히 말할 수 없다. 흐린 날이었던가, 비가 오는 날이었던가, 처음 눈웃음을 본 날이었을까, 말 몇마디를 나누던 순간이었을까. 무심결에 귀엽다는 메시지를 보낸 날이었을까, 따뜻한 손편지를 적어 보낸 날이었을까, 우리는 아무리 심사숙고해도 그 시작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어느 과정이 끝나고 나면,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차를 마시고, 잠깐이라도 보는 그 시간들이 좋아서 일부러 핑계거리를 찾고, 손을 잡고 입을 맞추는 시간들에 완전히 납득해버리는 것이다.
시작하는 연인들은 누가 먼저 좋아하기 시작했는지, 언제부터였는지 궁금해하곤 한다. 그러나 그런 질문들은 종내 무의미하다. 세상의 모든 연인들은 합리적인 세상에 맞선 우연과 비합리의 산물로 세상의 오류와 빈틈에 기거하기 때문이다. 사랑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3월의 눈치없는 빗방울이 정수리를 때린 후 처음 눈에 들어온 사람이 당신이었기 때문일 수 있다. 베토벤을 듣는 자리의 옆에 앉아있던 사람이 당신이었기 때문일 수 있다. 눈웃음을 짓고 나서 다른 사람에게도 그 눈웃음을 지었을 때 질투를 느꼈기 때문일 수 있다. 웃음소리의 음역대가 묘한 기억을 불러오기 때문일 수도 있고 비오는 날 같이 쓴 우산 아래에서 전에 없던 온도를 느꼈기 때문일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오류의 단서들이다. 이것들을 시간 순서로 조합해보았자 합리적인 결론에 이르기는 어렵다.
그리하여 어느날 정신을 차리고 보았더니, 꿈의 모든 상황들이 들어맞는 것처럼 당신을 깊이 사랑하게 되었노라고. 햇볕과 바람사이에서 핀 당신의 웃음이 말이 되지 않지만 완전히 납득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듯, 합리적으로 구성된 이 세상이 그 합리성으로 이리저리 붕괴되어갈 때 우리는 세상의 오류가 되어 제 멋대로 흘러가고 있는 중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말도 그다지 많지 않은 사람이 한 번에 일주일치 말을 쏟아붓는다. 과잉노출의 시간이 지나면 달리 할 말도 없어 글도 잘 써지지 않는다. 기대와 희망, 헌신과 애정, 질투와 추궁같은 연애의 커리큘럼을 충실히 행하는 와중에 시간은 잘만 흘러간다. 하루의 연애가 끝나면 밤처럼 누워 눈을 감는다. 꿈을 꾼다. 오월의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