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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형욱 May 30. 2024

잡문

당신 없는 이 밤에 내가 쓸 것이라고는 당신밖에 없네. 나는 해가 떠 있는 내내 당신만을 생각했지만 해가 진 지금 내게는 당신만이 없네. 하는 수 없어 그려보는 당신의 윤곽. 나는 그 불가사의한 곡선 안을 채울 색을 떠올려보네. 세상의 모든 치즈를 녹이면 당신의 색이 나올까. 빙하가 녹아 맑다던 계곡물을 퍼올리면 당신의 색이 나올까. 나는 아무래도 떠올릴수가 없네. 당신의 윤곽을 채울 수 있는 건 오직 당신의 색인데. 나는 그 색을 내가 가진 색상환의 배경으로 삼아 그보다 못한 색을 모두 지워버렸네. 그러자 밤. 빛은 들지 않고 땅은 눈이 멀어 세상은 당신의 덧칠을 기다릴 뿐인데.


그러다보면 해가 떠오고, 세상이 제 빛을 찾을 때, 맑아오는 하늘은 순전히 당신의 색을 닮으려 하네. 하늘은 당신의 웃음보다 맑은 적 없고, 나는 다만 당신을 올려다 볼 뿐이니, 이것을 사랑이라고 하자. 이것을 염원이라고 하자. 이것을 지난 밤 내가 본 당신의 윤곽이라고 하자.


몇 가닥 놓고 간 머리칼과 옷에 묻은 당신의 체취로 나는 당신의 눈동자를 기억하네. 당신의 손과 눈썹과 입술과 콧잔등에 얹힌 점 하나를 기억하네. 당신의 목덜미와 거기 있는 잔털과 손톱을 기억하네. 당신의 목소리와 흥얼거림을 기억하네. 한동안의 낮과 평생의 밤을 기억하네. 어지러운 당신의 윤곽들. 손을 더듬어 당신의 색깔을 찾는, 나는 지문에 당신의 색을 새긴 사람. 내 모든 지문으로 힘겹게 자판을 두들기는데, 당신 없는 이 밤에 내가 쓸 것이라고는 당신밖에 없네. 나는 당신이 내 옆에 있어도 당신이 곁에 없는 듯 당신이 그립고, 당신이 내 옆에 없어도 당신이 곁에 있는 듯 당신을 그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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