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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형욱 Jun 28. 2024

38세 이도윤 #7

 그녀를 바래다주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비는 그치지 않았다. 도윤은 커다란 우산을 쓴 채 밤을 지나가고 있었다. 참방거리는 소리가 발자국을 뒤따랐다. 가방은 무거웠다. 평일의 밤이었다. 아침 일찍 출근을 했고 수많은 일을 처리했으며 그보다 많은 사람을 뚫고 퇴근했다. 그러나 개운했다. 그가 사람을 만난 뒤에도 지치지 않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외출을 하고도 피곤하지 않은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기운이 솟아났다. 흥미로운 생각이 찾아오고 기분좋은 설렘이 찾아왔다. 마르지 않는 새로움이 느껴졌다. 자신이 우주의 충전기에 연결된 것 같았다.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세상은 끝없이 피어나고 있었다.     

 

 도윤은 진정한 사랑에 진입했음을 알았다. 하나의 덩어리진 생각이 결론부터 떠올랐다. 결론이 드러나자 세세한 증거들이 서둘러 결론을 감쌌다. 도윤은 억측과 속단을 지나 직관과 통찰에 가 있는 것처럼 느꼈다. 그는 이 사랑이 이미 정해진 일처럼 느껴졌다. 이것은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원하고 바란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저 그렇게 되는 것 뿐이다. 나는 이 여자를 찾기 위해 살았구나. 이 여자를 찾았을 때 충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살아남은 것이구나. 수많은 시간을 지나간 것은 적당한 때에 만나기 위함이었구나. 도윤은 삶에서 벌어진 모든 일들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녀의 깨끗한 눈빛을 떠올렸다. 물결치는 눈웃음을 떠올렸다. 웃을 때 살짝 보이는 잇몸,  귀엽게 어긋난 앞니, 짙은 눈썹을 군데군데 가리는 앞머리, 숱 많은 머리칼, 납작한 뒤통수, 핏줄이 비칠 만큼 하얀 피부를 떠올렸다. 근처에 가면 느껴지는 열대과일 향기, 길다란 손가락, 자그마한 손톱, 실로폰을 닮은 목소리를 떠올렸다. 코 위에 난 점, ‘요’와 ‘여’ 사이의 발음으로 마무리하는 질문들을 떠올렸다. 집중을 하면 빨개지는 얼굴, 한껏 웃으며 뛰어오는 모습, 장난스러운 몸짓, 턱을 괴는 습관, 웃을때마다 콧잔등에 스치는 주름을 떠올렸다. 그녀의 흔적 하나하나를 떠올릴 때마다 배 깊숙한 곳부터 뜨뜻한 감정 뭉치가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온몸으로 퍼진 감정조각들은 다시 심장으로 되돌아와 뭉쳤다. 도윤은 심장을 움켜쥐는 감정뭉치를 정확히 느낄 수 있었다. 그 감정뭉치에는 질감과 온도가 있었다. 부드럽고 뜨뜻했다. 도윤은 살아있다는 감각에 몸부림쳤다. 그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랑이었다. 전에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명백한 사랑이었다. 도윤은 과거와 미래의 모든 사건들이 한 여자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도윤은 그녀를 만나기 전부터 그녀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녀를 알고 나서도 그녀를 찾아 헤메고 있었다. 그녀는 생 하나를 통째로 내건 단 하나의 결론이었다.      


 지쳐서 헐떡거리고 무릎이 땅에 쓸려 주저앉아 기어서라도 다다른 곳에 결국 이 여자가 서 있구나. 이제 그녀에게 물 한 모금 얻어 마실 수 있다면 꽤나 축복받은 생이구나. 나는 그녀를 찾기 위해 살았고 그녀와 함께하기 위해 살게 되겠구나. 이것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정해진 운명이구나. 내가 죽을때까지 지켜야 하는 숙명이구나. 그는 그렇게 결론부터 알았다.


 비는 그치지 않았다. 그는 집에 돌아와서도 자신이 무엇을 체험한 것인지 헤아리려는 듯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그를 따라온 빗방울 하나가 팔꿈치를 지나 손목을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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