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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형욱 Mar 26. 2024

나의 첫번째 봄

꽃가루 날리던, 재채기 같던.

 그때 나는 미처 덜 자랐고 아직 충분히 살지 못했으므로 봄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너는 내가 본 적 없는 아름다움이었으므로 나는 새로운 계절 하나를 발명해야 했다.


 목련나무 옆으로 물이 흘렀다. 군데군데 벚나무가 함께 서 있었다. 잔디는 초록빛을 되찾았다. 어둑한 산책로 사이로 가로등이 가끔 빛을 뿌리고 서 있다. 해는 길어졌으나 밤은 충분히 빨리 왔다. 어두워도 춥지 않았다. 달빛을 받은 목련이 하얗게 빛났다. 목련을 보는 눈빛은 달처럼 빛났다. 섯불리 손을 잡았다. 너는 뿌리치지 않았다. 낮에 내린 햇볕이 그 손안에 다 있었다. 나는 걷고 또 걸었다. 달리 할 일이 없었다. 아직 충분히 걷지 않았으므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라 생각했다. 너도 걷고 또 걸었다. 사람이 걸을 때 이렇게 따뜻한 소리가 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간혹 너에게 입김이 나왔다. 입김이 가로등 불빛사이로 흩어지는 모습을 보았다.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이렇게 예쁠 수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내게 충분해질 수 없는 것들이 너에게 가득했다.


 “무슨 생각해?”


 질문에도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고였다가 넘실대다가 이내 넘쳐서 밀려오는 것을 말할 수 없었다. 그걸 말해버리는 순간 사라질 것 같았다. 피어버린 꽃이 끝내 지듯. 입김처럼 사라질 것 같은 파도. 이것을 무슨 생각이라고 불러야 하나. 너는 내가 발음해본 적 없는 단어였으므로 나는 언어 하나를 새로 만들어야 했다.

 “나는 꽃가루 알러지가 있어.”


 질문이 없어도 내던져지는 대답이 넘쳤다. 너는 모든 것을 쏟아내려나 보다. 나는 생각했다. 너의 대답들은 내 앞에 고였다가 넘실대다가 이내 넘쳐서 밀려왔다. 기억할 수 있을까. 나는 너의 말들을 머릿속으로 한 번 더 곱씹으며 오래도록 기억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너는 내가 기억한 적 없는 계절이구나. 나는 생각했다.


 “너는 이름마저도 예쁘구나”


 고르고 고른 말 중에 하나를 내뱉었다. 나는 마치 너의 이름을 기억한 채 태어난 것 같다. 고 생각했다. 이제 이 이름을 잊을 순 없겠구나. 평생 이름 하나를 기억하겠구나. 애써 곱씹지 않아도 기억하는 이름. 다 늙어서라도 간직하는 이름 하나가 있겠구나. 나는 이미 알아버린 것 같다. 


 나는 걷고 또 걸었다. 시간을 지나, 과업을 지나, 계절을 지나 걷고 또 걸었다. 인상을 찌뿌리며 재채기를 하던 날도 있었다. 그래도 걸었다. 대답이 없는 질문들을 던지며 멍하니 서있던 날도 있었다. 그래도 걸었다. 꽃이 피고 지는 시간을 겪지 못한 계절도 있었다. 그동안 많은 소리를 들었고 많은 것을 보았다. 많은 단어를 읽고 많은 계절을 겪었다. 수많은 이름들 사이를 걸어다녔다. 그사이 나는 미처 자라버렸고 충분히 살아버렸다. 그러다 오늘 가느다란 입김을 보았다. 아름다운 것들은 충분히 보았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지나고 보니 봄이었다. 물이 흐르고 입김처럼 구름이 흩어지던, 비 맞은 목련이 개울가에 모이던, 꽃가루 날리던, 재채기 같던, 그때,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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