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강물에 비친 천 개의 달 중에서

신상조 평론가 作

by 이종화

<계간비평> / 신상조

문학에서 ‘근대’에 가장 어울리는 단어는 ‘내면’이다. 일본의 언어 철학자 노에 게이치의 “이야기의 철학”에는 고독 속에 있는 개인이 밀실(서재) 안에서 써낸 문장을 소설이라고 부른다면, 자립한 개인이 스스로의 내면을 있는 그대로 토로하는 고백이야말로 소설에 가장 잘 어울리는 문체라고 밝힌다. 그는 또 “내 고백의 본래 목적은 생애의 모든 순간에 내 내부를 정확하게 알리는 것이다. 내가 약속한 것은 나 자신의 영혼의 역사이며, 그것을 충실하게 적기 위해서는 다른 메모가 필요 없다.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내 내부로 돌아간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다.”라는 격앙된 어조의 J.J. 루소의 부르짖음을 근거로, 서술자라는 가면의 배후에는 ‘있는 그대로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내면이 형성됨을 역설한다.
‘개인’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는 ‘individual’이다. 여기에는 ‘분리된 인간’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소략한다면 근대에서 문학은 내면의 영토화와 현실 반영이라는 측면에서 분리된 개개인의 운명을 토대로 수많은 삶을 다루었다고 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수필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그려낸다’는 격률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작가의 시선과 목소리의 개입이 최대화된 문학이다. 천 개의 강물에 비친 천 개의 달처럼, 독자는 수필을 통해 서술자의 배후에 페르소나가 소거된 천 사람의 진솔한 삶과 만난다. 그렇더라도 같은 성질의 성격으로부터 특징을 모아서 전형(典型)을 구성해 간다면, 아마도 천 사람의 숱한 목소리는 다음과 같은 대략적 목록으로 정리될 수도 있을 것이다.
“계간수필” 2025년 봄호에 실린 작품 중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키워드는 ‘노년의 삶’이다. (중략)
목록 중에는 '현대인의 삶'이란 키워드도 들어 있다. 계엄 사태로 탄핵 소추니, 특검법이니 하는 법적 용어들이 난무하는 걸 지켜보며 심란해하는 김애자의 ‘땅을 지키는 사람들’과 편의점을 배경으로 하는 도시인들의 피로한 일상을 잔잔하게 그려낸 허정열의 ‘밤요일(曜日)의 사람들’은 제목에 공통으로 들어 있는 ‘사람들’이 지시하듯 현대인들의 초상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조아섭의 ‘꼴값’은 제목의 의미 그대로 현실에 대한 비판을 숨기지 않는다. 이 중에서 이종화의 ‘사잇길’은 은유로 가득하다. 작가는 “직장”을 “서랍장”에 빗댄다. 개개인은 “어느 서랍에 배속되었”다가 “거기서 소속감을 생산하고 그걸 소비하면서 아래칸에서 위 칸으로 차례차례 올라”간다고도 표현한다. 여기서 아래 칸과 위 칸은 사다리의 이미지와 중첩된다. 은유는 또 있다. 직장에는 “빨간 깃발을 든 사람과 파란 깃발을 든 사람이 있”다. ‘직장 상사’라는 원관념이 거느리는 게 바로 이 ‘깃발을 든 사람’이라는 보조관념이다. ‘빨간 깃발’과 ‘파란 깃발’은 다시 작가의 앞에 놓인 ‘두 갈래’길로 이중적으로 비유되는데, “빨강과 파랑은 지성과 감성, 금전과 시간, 이기심과 봉사심, 그리고 성장과 안정”이라는 의미를 가진 채 이분법적으로 구분된다. 사실 은유를 활용하지 않았다면 몇 장의 원고지에 담을 수 없을 크기의 담론들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에서 “일상적인 낱말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만을 전달한다. 생생한 어떤 것에 이르는 최선의 길은 은유를 통하는 것이다.”라고 강조한다. 심지어 그는 은유는 천재의 표상이라고까지 이야기한다. 과연 “사잇길이 생기는 건 빨강과 파랑이 대립하기 때문”이라는 논리적 비유는 명쾌하고 설득적이다. 외에도 “빨간 콩과 파란 콩을 절반씩 한 포대에 섞은 뒤, 하나를 주고 하나를 받았다면서 이게 절충이라 우겼다.”라거나 “사람들은 이 깃발과 저 깃발 사이를 분주히 오갔다. 어제는 빨간 깃발 아래에 있던 사람들이, 오늘은 파란 깃발 근처에서 서성였다. 그게 세상이었다.”라는 목소리에는 사람과 세상의 부조리함을 풍자하려는 단단한 결기가 느껴진다.
이종화의 글에서 활용된 단단한 은유는 최종적으로 인생을 함의하는 ‘길’로 수렴된다. 덧붙이자면 “두 갈래 길, 어느 한쪽을 선택했다고 다른 한쪽을 영영 만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길은 곧게 뻗어가는 것 같지만 길과 길 사이에 놓인 수많은 사잇길에서 인간은 새로운 길을 찾아 발자국을 남기고 또 남”긴다는 결미의 전언은 글을 매듭짓기 위해 작가 서둘러 갈래길을 수용한다는 아쉬움을 남긴다. 내적 갈등의 봉합과 미래에 대한 약속이 이번 글에서 그가 선택한 길이겠다. 작가는 여전히 “택하지 않았던 그 길로부터 이어졌을 새로운 길을 마주하면서” 걸어갈 터이고, 우리에게는 작가의 다음 글을 읽을 수 있는 즐거운 선택이 기다리는 것이다.

* 문학평론가. 중앙일보 평론 부문 등단(2011). 계명대학교 강사 역임. 대구일보 '문향만리' 연재. 계간 "가히" 편집위원. 평론집 "붉은 화행." 산문집 "시 읽는 청소부."

(계간수필 2025년 여름호)


※ 이종화 "사잇길"

https://m.blog.naver.com/essayclub03/223788918122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