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마법같은 여름이 온다면
마법의 여름
얼음장같이 차가운 계곡물에 손을 담갔다. 이 물로 세수도 하고 머리도 감으라니. 말도 안 돼. 옆 아이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이게 뭐야?” 새끼손톱만 한 청개구리들이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있었다. 연둣빛 새끼 청개구리. 그렇게 많은 개구리를 처음 봤다.
강원도 두메산골, 내가 가본 강원도 중에서 제일 깊은 산골에 위치한 초등학교에 갔다. 6학년 걸스카우트에서 떠난 자매학교 캠핑이었다. 큰 관광버스 몇 대가 꼬불꼬불한 산길을 넘어 풀숲을 거의 헤치고 들어간 곳이었다. 지날 때마다 길가에 서 있던 나뭇가지가 버스의 유리창을 툭툭 건드렸다. 울퉁불퉁 비포장 도로를 한참 달려 도착한 곳은 산속에 있는 집. 우리가 묵을 곳은 책에서만 봤던 초가집이었다. ‘뭐 이런 데서 자야 한다고?’ 조별로 가져간 배낭을 풀어 방 한쪽에 쌓아 두고, 그 집에 살고 있는 여자 친구와 우리 조원들은 집 뒤편에 있는 들판으로 갔다. “이게 무슨 꽃이야?” 정확한 꽃 색깔은 기억이 안 나지만 안개꽃 같은 꽃들이 들판 가득 피어있었다. 탄성이 절로 나왔다. 꽃을 한 아름 가져갔더니 그 집의 어머니께서 사이다병을 주셨다. 여기에 꽂아 서울 갈 때 가져가라고.
여름마다 읽는 그림책이 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많이 읽어준 <마법의 여름>이다.
뒤로는 빌딩 숲이 보이는 곳에서 두 형제가 걷고 있다. 땀을 뚝뚝 흘린 채. 밀짚모자를 쓰고 가방을 질질 끌며 걸어가고 있는 모습은 지쳐 보인다. 아. 울고 싶어라. 여름 방학인데 아빠와 엄마는 회사에 가셨고 아이들은 학교 수영장에 다녀와 게임도 한 판하고 감자칩도 먹고 보리차도 마셨지만, 왠지 허전하다. 아이들은 생각한다. ‘뭐 재미있는 일 없을까?’
시골 외삼촌 집에 초대받은 아이들은 비행기를 탄다. 이제부터 여름 방학이 시작되는 거라고 야호! 소리를 지른다. 이발사인 외삼촌은 아이들의 머리를 싹둑싹둑 잘랐다. 마치 시골에선 꼭 그래야 하는 것처럼. 시원해진 머리 스타일을 하고 드디어 형제는 동네 아이들을 만난다. 자신들과 다른 것은 오로지 피부색뿐! 새까만 피부를 가진 아이들과 형제는 곤충채집도 하고, 나무에 오르기도 한다. 그러다가 웅덩이의 모기한테 물리기도 하고, 온몸은 흙투성이가 된다. 시골 아이들과 다른 건 피부색뿐만이 아니었나 보다. 넘치는 체력, 신나게 놀 줄 아는 능력, 즐기는 마음. 지친 형제는 울음을 터뜨린다. 하지만 그들은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하나가 된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이런 비는 처음 맞아본다고. 마치 하늘에서 뿌리는 샤워 같다고.’
석양이 지는 바닷가에 간 형제는 지는 해를 바라본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다. 무엇도 아쉬운 마음이 없는 상태. 마음껏 놀았을 때 생기는 흐뭇한 마음이다. 형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야무져진다. 누구보다 빨리 일어나고, 전자를 타고 멀리까지 심부름도 갈 수 있고, 수박씨도 멀리까지 뱉을 수 있다. 전에 없었던 능력이다. 집으로 돌아갈 때 형제의 모습은 전과는 정말 달라져 있다. 새까매지고 키도 훌쩍 커 있다. 게다가 웃고 있다! 형제에겐 마법의 여름이었으리라.
이 그림책을 볼 때마다 걸스카우트 캠핑이 생각난다. 작은 시골 분교에서 침낭을 펼치고 자고 운동장에서 캠프 화이어를 하며, 낮에는 계곡물에서 첨벙거리고 수영을 하고, 들판을 마구 달리던 서울 아이. 내 어릴 적 모습이 형제와 닮아있다. 서울로 돌아오는 날, 들꽃을 사이다병에 꽂아 주셨던 어머니가 보자기 가득 싸 주셨던 감자와 옥수수. 멀리 떨어져 있어도 손 편지로 주고받았던 친구와의 우정이 꿈만 같다.
“저녁 먹어!” 일일학습지를 풀고 나서 저녁 먹기 전, 어스름하게 어둑해질 무렵, 정림아파트 아이들은 약속한 것도 아닌데 밖에서 만났다. 콩콩이 한 대 씩을 가지고. 두 발을 콩콩이에 대고 위로 뛰어오르면 휘청거리기도 하지만 그래도 앞으로 나갔다. 우리는 콩콩이 부대였다. 아파트 1,2,3동을 차례대로 한 바퀴씩 돌고 나면 어김없이 여기저기에서 “밥 먹어” 소리가 흘러나왔다. 고추잠자리랑 메뚜기를 잡는다고 풀밭을 뛰어다니고, 흙에 물을 섞고 들꽃을 꺾어 소꿉놀이를 하던 시절. 땅따먹기와 고무줄놀이를 하던 아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어릴 적 여름을 떠올릴 때마다 내 안의 어떤 부분이 꿈틀거린다. 개구리를 쫓아 풀밭을 달리고, 꽃을 모아 소꿉놀이를 하던 그때처럼. 이젠 나는 다 커버린 어른이지만, 마음만은 다시 여름방학을 시작하는 아이처럼 설레고 싶다. ‘오늘은 뭘 하며 놀지?’ 생각만으로 웃음이 나는, 그런 마법 같은 여름이 다시 올지도 모른다. 좋아하는 걸 하며 하루를 보내고, 때로는 흙투성이가 되어도 좋은 그런 여름을. 나도 다시, 신나게 놀 줄 아는 어른이 되고 싶다. 올여름엔 그 마음부터 꺼내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