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기억
며칠 만에 밤송이들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 알맹이는 벌써 비어져있고 벌어진 껍데기만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비가 와서 그런지 여전히 계곡물은 콸콸 소리를 내며 흐른다. 안개가 자욱한 숲 속을 천천히 걸었다. 몸살 걸려 삼일을 쉬었더니 경사가 얕은 길을 오르는 데도 숨을 헉헉댔다.
갈 때마다 은행나무숲을 찍는다. 11월이면 노랗게 물드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지금부터 변하는 모습을 담아두고 싶었다. 매해 노란 잎이 수북이 쌓인 숲에서 아이들을 세워놓고 사진을 찍었다. 올해도 변함없이 산에 오르겠지. 지난주와는 다르게 푸른 잎이 연한 푸름으로 바뀐 거 같다. 쨍한 초록에서 그냥 초록으로 옅어진 빛깔로 나뭇잎도 변화할 준비를 하고 있다.
나무 사이에 매달린 거미줄이 오늘은 새롭다. 아마도 <각각의 계절> 기억의 왈츠에서 밑줄 친 문장 때문일 것이다. 은빛 베일과 삼베 같은 거미줄 중에서 오늘 본 거미줄은 삼베와 같았다. 곱고 반짝이는 베일이 아니라 투박하고 거친 삼베 같은 것. 삼베에 걸려 매달려 있는 곤충들. 그러고 보니 나무마다 작고 큰 거미줄이 가득했다. 작가는 이런 거미줄을 보고도 결혼과 죽음에 대해 생각할 수 있어야 하나보다. 은빛 베일은 결혼을, 삼베는 죽음을 떠올리며 쓴 문장을 다시 읽고 싶어졌다.
"나는 햇빛에 비친 은빛 베일과 그늘진 곳의 삼베 같은 거미줄을 보며 결혼과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누군가는 저렇게 빛나는 베일을 쓰고 결혼을 하고 누군가는 저토록 날긋한 삼베를 수의처럼 덮고 죽는지도 모르지."
<각각의 계절> p222
<각각의 계절> 중 단편 <기억의 왈츠>에서 밑줄 친 문장이다. 주인공 '나'는 동생 부부와 숲 속 식당에 가게 되며 오래전 지나가버린 '청춘의 시절'을 기억한다. 그 당시의 '나'는 '위험한 무엇을 가만히 갖고 있는 것으로는 안 되고 그걸 어떻게든 뱉어내거나 발산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사람이었다. 마음 한구석 그림자와 유령으로 가득한 세계에서 빠져나가고 싶어 발버둥 치면서도 쉽게 그렇게 되지 않는, 고통받고 삶이 공허한 사람이었다.
"그 당시의 나는 감정적으로 완전히 폐허였고 욕망이 소진된 폐광이었다" p219
대학에서 경서를 만나면서 그녀의 마음에도 변화가 일어나는 듯했지만 오래 이어가지는 못한다. '어떤 신호가 반짝 켜진 것 같은'순간이 오기도 하지만 오래 지켜내지 못한다.
북클럽에서 이런 질문을 했다. 내 삶에서 나를 반짝이도록 만들어준 사람이 있냐고. 나를 응원해 주고 다시 새로운 욕망을 갖게 해 준 사람이 있느냐고.
"오래전 젊은 날에, 걸리는 족족 희망을 절망으로, 삶을 죽음으로 바꾸며 살아가던 잿빛 거미 같은 나를 읽고 이해해 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 사람과 함께 하나, 둘, 셋 왈츠를 출 수도 있겠다고. 그때는 도망쳤지만 지금은 손을 내밀고 마주 보고 빙그르르 돌며 춤을 출 수도 있겠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이제 더는 도망치지 않을 거라고.
때로는 기억만으로도 다시 살아낼 이유가 된다.
그러니 오늘 좋은 기억을 쌓아가자고. 나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