갱년기 말고 성장기
모든 것이 부서지지는 않았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딸의 첫 등교일을 함께 했다. 새벽 6시 반에 나와 평내호평역으로 갔다. 6시 46분 ITX를 탔다. 새벽에 지하철을 탄 적이 언제였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제 입학식 날 선배들의 공연과 오리엔테이션 때문에, 집에 거의 11시가 다 되어 들어온 딸은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다. 종일 왔다 갔다 하고, 선생님과 선배들의 이야기를 듣느라 긴장도 했겠지. 집에서 학교까지 거리가 멀어 기다리고 타고 서 있는 시간도 길었을 테고. 딸의 표정을 살피며 걱정하지 말라고, 처음이라 더 힘든 거라고 다독였다. 잠을 푹 자지 못하는 게 제일 큰 걱정이었다. 겉으로는 덜렁대지만, 마음먹은 일엔 완벽을 추구하는 딸. 그래서 제대로 잠들지 못했을 게 분명했다. 나도 잠이 오지 않았다. 알람소리를 못 듣고 그냥 잘까 봐 새벽 4시, 5시 계속 눈이 떠졌다. 남편이 깨우는 소리에 일어나니 정신이 몽롱했다.
혼자 지하철을 타고 서울까지 가본 적이 몇 번 없어 지하철 노선도를 보여주고, 학교까지 가는 길을 설명했다. 딸은 계속 “내가 알아서 할게.” 했지만, 방향 감각이 없어 걱정이 되었다. itx에 타서 나란히 앉아 주변을 둘러보니 차에 탄 거의 모든 사람이 자고 있다. 옆자리에 앉은 여자는 화장하고, 뒷자리에 앉은 아저씨는 알람이 울리는 줄도 모르고 계속 잔다. 표를 못 구했는지 서서 가는 사람도 있었다. 용산역에 내려 1호선 갈아타는 출구로 뛰었다. 지하철 단말기에 카드를 찍고 돌아서니 벌써 에스컬레이터 줄이 길었다. “먼저 뛰어!” 행여나 갈아타는 지하철을 놓칠까 봐 딸에게 소리쳤다. ‘이래서 등교 시간은 맞출 수 있으려나.’ 딸이 매일 같은 길을 왕복해야 한다는 생각에 한숨부터 나왔다. 학교 근처에 가서야 딸이 말한다. “이제 나 혼자 갈게. 엄마는 어떻게 또 가?” 교복 입은 학생들이 길게 무리 지어 교문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등교 첫날이고, 초행길이라 당황할까 봐 같이 갔는데 내일부터는 혼자 갈 수 있다고 한다. 뒤돌아서서 다시 역으로 가는 길, 자꾸만 뒤돌아보았다. 딸이 교문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고서야 안심이 되어 발길을 돌렸다. 교실에 도착한 딸에게 톡이 왔다. “어디야? 나 교실에 들어왔어.”
학력고사 보던 날, 교문으로 걸어가는데 등 뒤로 아빠가 서서 나를 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고사장으로 들어가는 순간 내 마음이 어떨지 아빠는 알고 있었을까. 추운 겨울 차를 타고 하며 살가운 말 한마디 나누지 못하는 부녀지간이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엘리트. 회사에선 승승장구였지만, 집에선 무뚝뚝하고 차가운 사람이라 나는 늘 아빠가 어려웠다. 아빠에게 하고 싶은 말은 엄마를 통해 말하고, 아빠 앞에선 입이 꾹 다물어졌다. 어쩌다 아빠와 단둘이 집에 있으면 어색해서 자리를 피할 정도였다. 아빠와 친구처럼 지내는 친구들이 늘 부러웠다. 기분이 좋을 땐 동생과 나를 데리고 회사 근처 백화점에 데려가 장난감을 사주고, 점심을 사주던 아빠였지만. 나도 살가운 딸은 아니었으니까 아빠도 외로웠을까.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우리 집은 살얼음판이었다. 큰 소리가 오가고, 아빠가 나가면 엄마는 눈물을 흘렸다.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던지던 아빠 얼굴이 보기 싫어 집을 나가고 싶은 마음이 수시로 들었다. 일방적으로 아빠가 화를 많이 냈고 엄마는 늘 참았다. 학원 갔다 집에 가면 거실 바닥에 물건들이 던져져 박살이 나 있었다. 반들반들 윤이 나던 엄마의 그릇, 꽃병, 액자. 그럴 때마다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무섭기도 하고, 두려워 다시 밖으로 뛰쳐나갔던 적도 있다. 혼자 집에 있던 엄마를 외면했으면 안 되었는데. 고등학교 때부터 기울어진 가정환경은 점점 안 좋아졌다. 집이 팔리고 더 작은 집으로, 낯선 동네로, 이리저리 이사를 다녔다. 아빠는 새 여자를 만났고, 다시 재기한다며 사업을 시작했다. 결혼해 살림만 하던 엄마는 동생과 나를 키울 능력은 되지 않아 새 여자가 있는 집에서 동생과 나는 어쩔 수 없이 함께 살았다. ‘그래도 아빠랑 살아야지 대학 공부하지.’ 이혼 소송이 진행되고, 엄마는 외삼촌 집에서 매일 나에게 전화했다.
‘잘 먹고 다녀야 돼. 엄마가 도시락 못 싸줘서 어떡하지?’ 전화기 너머로 들리던 엄마 목소리는 떨렸다. 매일 딸 든든하게 먹인다고 부엌에서 음식 하던 엄마가 얼마나 조바심이 났을까. 그래도 그때는 몰랐다. 엄마 마음이 어떨지. 엄마 없는 고3 생활이 서러워 밤마다 교복 블라우스를 빨면서 울었으니까. 내가 제일 불쌍한 아이라고, 내가 제일 슬프다고. 따뜻한 점심 도시락이 그리워서, 마음껏 울고 싶은데 울지 못하는 내가 바보 같아서. 어른이 되어서도 그때 받지 못한 사랑과 보살핌이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었다. 아빠가 싫었고 엄마는 불쌍했다.
정혜윤의 책 <슬픈 세상의 기쁜 말>에 어부의 에피소드가 나온다. 파도가 부서졌다가 다시 생겼다가 하는 것이 꼭 자신의 인생 같더라고. 많이 부서졌고 많이 일어섰다고.
“그렇게 생각하니 그는 자신의 인생에 일어난 이런저런 일들에 다정한 마음이 들었다. 살면서 겪었던 많은 일들이 그토록 듣고 싶었던 엄마의 충고. 얘야, 조심해라!, 얘야, 밥 잘 먹고 다녀라!”처럼 느껴졌다. 돌아보니 모든 것이 부서지지는 않았다. p38
내 마음이 가장 추었던 그 시절, 아빠에 대한 원망으로 지냈던 시간들. 나이 오십이 넘어서야 그때의 나를, 엄마를, 아빠를 그리워하며 꺼내본다. 힘들었던 시기였다고 돌아보기 싫어했던 그 시절, 고사장을 향해 걸어가는 나를 쳐다보던 아빠의 마음을 이제야 헤아리게 된다. 힘든 순간에도 나를 살아가게 한 다정한 마음들을 꺼내어 보며 ‘그래도 잘 살았네’ 혼잣말을 한다.
하교 시간 4시 반, 톡이 왔다. 학교가 끝났다며 오늘은 집에 일찍 갈 수 있을 것 같다고 한다. 그 말에 얼른 냉장고에 있는 돼지고기를 꺼내 수육을 만들고 된장국을 끓인다. 혼자 먼 거리 올 딸에게 “조심히 와. 엄마가 기다릴게!” 톡을 보냈다.
내가 딸의 나이였을 때, 따뜻한 밥 한 끼가 그리웠다. 말 한마디 다정하게 건네주는 어른을 기다렸던 힘들었던 시절. 이제 나는 그때의 나에게 해주고 싶던 마음을 딸에게 주고 있다.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건 별다른 게 아니었다. 그저 누군가를 위해 밥을 짓고, 기다려주는 일. 나를 응원하는 친구의 쪽지 같은. 작고 소소한 마음이 삶을 붙잡아준다. 서로의 다정함에 기대어 우리는 여기까지 왔다. 상처투성이로 부서질 듯한 시간이 있었지만, 결국 모든 것이 부서지지는 않았다. 나는 밥을 하고, 국을 끓이며 기다리는 엄마가 되었다.
기다림 속에 담긴 마음이, 오래전 내가 그토록 바라던 사랑이었다는 걸 이제야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