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골드의 계절, 다시 나를 피우다

갱년기 말고 성장기

by 에세이가주

모니터를 볼 때마다 눈이 흐릿해졌다. 눈을 계속 깜박였다. 30분 이상 집중해서 볼 수 없었다. 오전 수업을 끝내고 안과에 갔다.

“시력 검사하실 거예요?”

"눈이 요즘 뿌옇게 보여서요."

혹시 백내장이나 다른 질환이 생긴 건 아닐까 걱정했다. 의사 선생님 앞에 놓인 기계에 턱을 괴고 찰칵 사진을 찍었다. 시력 검사용 안경을 끼고 앞에 있는 숫자판에 적힌 글자를 읽었다. 7. 4. 2. 뿌옇게 보이긴 했지만, 시력은 나쁘지 않았다. 1년 전 검사할 때와 비슷한 0.8이었다. 어릴 적부터 시력 하나는 좋았다. 양쪽 모두 1.5였으니까. 돋보기안경을 껴야 한다고 한다. 모니터용과 독서용이 있단다. 주로 모니터 볼 때 안 좋으니 모니터용으로 맞추기로 했다. 선생님이 말한다.


"50대 넘으면 30,40대처럼 무리하면 안 돼요. 모니터랑 책 많이 보면 당연히 나빠지죠. 관리해야 해요. "

나를 앞에 앉혀두고 혼내듯이 말한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에게까지 다 들릴만한 소리로. 오십, 오십 너무 강조하시는 거 아니에요? 선생님!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모니터 용으로 맞출게요 라는 말만 하고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만으로 따져도 빼도 박도 못하는 오십이 맞는데 아직은 어색하기만 한 숫자다.

첫 책 부제에 오십이라는 단어가 들어갔을 때 출판사 편집자에게 말했다. “저.. 마흔이라고 바꾸면 안 될까요?” 오십이 훌쩍 넘었건만 내 마음은 아직 사십 대에 머물러 있었다. 어릴 땐 마흔 넘으면 다 같은 아줌마였는데 이제는 사십 대 동생들이 부럽다. 내가 그 나이면 진짜 좋겠다고, 오 년만 어렸으면 딱 좋겠다고. 뭐든지 시작할 수 있는 나이라고.



갱년기는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삶의 문턱이다. 몸의 리듬이 변하고, 마음도 흔들리는 시기다. 이전엔 당연했던 일들이 버거워지고, 이유 없이 울컥하거나 무기력해지는 때이다. 그냥 참고 넘겼던 일들을 다시 꺼내어 되짚어 보면서 뒤끝 있는 아줌마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내가 억울했어, 힘들었어, 그때는 왜 그랬었나. 하지만 지나간 시기는 되돌릴 수 없는 법. 자꾸 곱씹으며 마음에 담아두어 봤자 내 손해라는 걸 인정하는 나이이기도 하다. 젊었을 땐 ‘다 이러고 사는 거지’ 했던 마음이 이제는 ‘조금 다르게 살아도 되지 않을까’로 바뀌는, 깨어나는 시기이기도 하다.


갱년기는 몸이 우리에게 유한성을 통보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젊음의 에너지는 사그라들고 몸 여기저기가 삐끗거리는 때다. 안 먹던 영양제와 콜라겐을 털어먹고 커피를 마시고 싶은 욕구를 참으며 눈에 좋다는 마리골드 꽃차를 마셔야 하는, 건강을 생각하는 나이. 죽기 살기로 운동해야 겨우 체력이 유지되기에 이제는 안 하면 죽는다라는 각오로 아침마다 산에 오르기도 한다. 다이어트, 몸매 관리보다 다리 근육이 빠질까, 뼈가 약해질까를 더 신경 써야 하는 나이이기도 하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존재를 자각하는 유일한 존재”라 했다. 갱년기의 시기야말로 우리가 스스로의 존재를 처음으로 깊이 자각하는 때다. 가족과 사회 속 역할에 몰두하느라 ‘나’를 미뤄두었던 세월을 보내고 이제야 나에게 묻는다. 나는 지금 어떤 존재로 살고 있는가? 하고.

읽고 쓰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읽으며 묻고 쓰면서 또 묻는다. 내가 원하는 삶은 어떤 모양이냐고. 갱년기를 통과하며 내 마음 깊이 묻어두었던 우울과 고통의 감정을 직시하게 되었다. 싸워야 할 때는 싸우며 침묵이 필요할 때는 고요하게, 나를 지키는 방법을 하나씩 터득해 가면서.


<꽃피는 미술관> 책을 폈다. 오후의 빛이 거실 가득 들어올 때였다. 주황색 마리골드 꽃그림이 눈에 들어온다. 마리골드 꽃말은 ‘반드시 오고야 말 행복’이라 한다. 갱년기는 잃어가는 시기가 아니라, 행복을 새롭게 배우는 시기일지도 모른다. 함께 책 읽고 이야기하고 공부하는 일상이 좋다. 나는 지금, 갱년기 말고 성장기를 통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