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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자 Sep 16. 2022

그 접수 내가 할게요, 느낌 아니까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처럼 부모는 자식을, 자식은 부모를 다 알지 못한다. 이걸 더 일찍 알았더라면 나는 과연 우리 엄마 속을 덜 태울 수 있었을까.


헤어 미용사 국가자격증을 일찍이 취득한 우리 쁨이는 대학에 안 가고 취업해서 돈 벌겠다는 말을 완강히 해왔다. 그래. 단순히 미용실 일만 하며 살아도 만족할 수 있다면 하루 빨리 취업해서 제대로 배우고 경력 쌓아 샵 하나 차리면 그만일 수 있다. 그렇지만 좀 더 살아 본 나는 기회를 저버렸던 후회들을 숱하게 해봤기에 잡을 수 있는 기회는 일단 잡고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만들어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부모로서.


그 접수 내가 할게요, 느낌 아니까

손에 쥔 것을 두고 여유 있게 생각하는 것과 놓쳐버린 것을 바라만 봐야 하는 건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쁨이의 뜻과는 별개로 대학을 알아보니 4년제 수시는 이미 끝나버렸고 2년제만 남아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SKY, 서성한 아니면 다 거기서 거기라고 알아주지도 않는다는데. 지방에서 4년제면 어떻고 2년제면 어떠하리. 정말 대학을 안 간다고 하더라도 우리 쁨이만 후회 없이 잘 먹고 잘 살기만 한다면 나는 그걸로 족하다.


다만, 내년에 친구들이 대학에 입학하는 모습을 보며 아쉬워할까 봐. 다 그런 건 아니지만 편의점, 카페 아르바이트도 학력 조건을 내건다는 요즘 사회에서 후회할 일이 조금이라도 덜 생기길 바라는 부모의 마음으로. 시간을 두고 생각할 기회를 만들어 주려는 것뿐이다.


그래도 4년제 접수를 놓친 건 솔직히 아쉬웠다. 최소한 석사학위 정도는 있어야 현장직은 물론이고 전임이든 겸임이든 대학교수까지도 노려 볼 수 있다고들 하니까. 물론 2년제를 나와도 시간 강사 정도는 할 수 있다는 거 알고 있지만 그런 자리가 흔치도 않을뿐더러 이왕이면 안정적인 교수직이 낫지 않나 싶은 부모 마음에 못내 아쉬웠다.


어쨌거나 지나간 버스 후진해 올 것도 아니고 2년제마저 놓치기 전에 일단 접수부터 하자며 1차에 접수했고 얼마 후 합격 통보를 받았다.


쁨이에게 말했다. 이제 너의 손엔 합격증서가 들려있다. 어떤 선택이든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입학 전까지 아쉽지 않을, 후회 없을 선택을 하길 바란다. 엄마가 해 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엄마는 너에게 기회와 방향만을 만들거나 제시해 줄 뿐 모든 선택은 네가 하는 것이고 그 선택에 따른 결과 또한 온전한 너의 몫이다. 물론 엄마가 나눌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나눠 감당할 테지만 살아보면 그럴 수 없는 것들이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될 거다. 이를테면 너를 대신해 대학 학력을 취득해 줄 수 없고, 너를 대신한 선택적 인생을 살아줄 수 없다는 것. 그러니 무조건 덮어만 두지 말고 내년 입학까지 아직 많은 날이 남았으니 신중히 생각하면 좋겠다. 원서 접수 시기를 놓치거나 합격증서를 받지 못해 대학에 갈 기회 조차 얻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텐데 너는 지금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그 손에 달려있다. 그 누구도 아닌 오직 너만을 위한 선택을 하고 멀리 봐서 잘 생각하길 바란다. 이 또한 일종의 행복한 고민이지 않나. 엄마는 네가 어떠한 선택을 하든 적극 지지하고 응원할 거다.




그렇게 2022년 새해가 밝았고 쁨이는 대학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가고 싶어서가 아니라 대학은 뭐가 다른지 궁금해서 가는 거라고 했다. 이유야 어찌 됐든 감사했고, 친구와 대학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며 역시 접수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에 안도했다.


이윽고 3월 2일 우리 쁨이는 대학생이 되었고 1학기 방학을 마치고 2학기가 시작되자 3학년 편입도 생각 중이라고 했다. 4년제를 졸업하면 교수직도 할 수 있다는 내 말이 언제인지 모르게 귓전에 닿았나 보다. 가 봐야 아는 길이지만 일단 또 그렇게 꿈을 심어줬으니 그 길을 위해 함께 달리며 부지런히 준비해야겠다. 나는 엄마니까.


세상은 넓고 갈 길은 많다.
어디로든 가보는 거야, 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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