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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자 Nov 10. 2023

흔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없었으면 좋겠을 직장인의 고충

지난달 이후 한 달 만에 만난 이십대 초반의 8급 공무원인 푸름씨. 처음 대화를 나누었을 때 그녀는 학교 졸업하고 바로 일하느라 그 나이 먹도록 이룬 것도 없고 다른 친구들에 비해 대학도 이제야 1학년인 데다가, 30대 팀장 때문에 직장을 그만둬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취업해 일했느라 1학년인 거잖아요. 이룬 게 왜 없어요. 공무원인데요. 지역인재전형이라도 어쨌거나 시험 보고 면접 치러서 합격한 사람만이 될 수 있는 거고 수습 기간까지 거쳐야 지금의 그 자리까지도 갈 수 있는 거잖아요. 그 과정이 쉽진 않았을 테구요. 친구 중에는 반대로 푸름씨가 부러운 친구도 있을 거예요. 잘은 몰라도 내 생각엔 되게 열심히 살고 있는 것 같은데요? 그럼에도 자존감이 떨어진다면요. 잘못한 것보다는 잘한 것만 생각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에요. 잘못한 건 누군가의 지적을 어김없이 받기도 하고 스스로 깨닫기도 하지만 그에 비해 잘한 것은 남이나 나 자신도 매 순간 캐치하지 못할 때도 있고 기준점이 높아 칭찬에 인색하기도 하니까요."


"그런 것 같아요. 사실 잘한 것에 대한 생각은 거의 안 해 봤어요."


"그럼 오늘 저녁부터 이렇게 한번 해볼래요? 매일 저녁 오늘 내가 잘한 걸 다이어리에 적어 보는 거예요. 잘못한 것 말고 잘한 것만요. 아주 사소한 것부터 생각나는 모든 것들을. 이를테면 원래는 알람을 듣고도 몇 분씩 다시 알람을 누르며 늦게 일어나는 편인데 오늘은 한 번에 딱 일어났다. 회사에 청소하는 미화원이 있긴 하지만 지나가는 복도에 떨어져 있던 쓰레기를 주워 쓰레통에 넣었다. 굳이 오늘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인데 어차피 내가 해야 할 일이기에 미루지 않고 끝냈다. 이게 뭐냐면 제 기준으로는 과제 같은 건데요. 기한이 한참 남은 레포트를 미리 끝내면 여유로워서 좋고 밤 설거지를 미루지 않고 하고 자면 다음 날 물 마시러 나갔을 때 깨끗하게 텅 비워진 싱크대를 보면 기분이 좋더라구요. 그럴 때 나는 "(피곤했지만) 잘했어"라는 말이 뿌듯하게 나오더라구요. 이런 것도 잘한 걸까?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까를 생각하지 말고 그냥 막 적어 봐요. 끄트머리에 기분을 덧붙이면 더 좋구요. 이래서 좋았다. 그래서 뿌듯했다. 기뻤다. 즐거웠다. 시원했다. 후련했다. 대견하다. 등등."


"아..."


"적다 보면 좀 웃기기도 할 테지만 자기 관찰, 자기 공감도 되고 좋거든요. 그리고 직장은요... 혹시 자기 전에 그 팀장이 생각나나요? 다음날 볼 생각에 벌써부터 힘이 들고 화가 나고 그래요?"


"아뇨."


"그럼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요?"


"안 나요. 그때는 안 나는데 먼저 출근해 있을 때 팀장 오는 소리가 들리면 그때부터 기분이 항상 하아... 안 좋아져요."


"그러면은 일단 그 팀장이 웬수같은 놈은 아니란 거네요. 맞아요?"


"네. 그 정도는 아니에요."


"그럼 일단은 아까 말한 거를 매일 저녁 적으면서 시간을 좀 두고 생각해 보는 건 어때요? 그 팀장이 업무와 무관한 일들로 인신공격, 인격모독을 한다거나 괴롭히는 그런 게 아니라면요."


"그럴게요!"


이렇게 희망차게 헤어졌던 그녀는 한 달만의 반가운 소식과 함께 두 명의 인물 문제를 추가로 들고 왔다.


"그(때 말한) 30대 6급 팀장요. 하아... 진짜!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를 알려주면 좋을 텐데, 알려주지도 않고 다시 하라고만 해요. 그래서 어디를 고치면 되냐고 물어보면 계속 같은 말만 해요. 무조건 다시 해오라고요. 그래서 제가 대체 어디를요. 여기요? 이거요? 이렇게 이렇게 하나씩 집으면서 물어보면 그러래요. 그냥 처음부터 그렇게 말해주면 좋잖아요. 사람들 많은 데서 다 들리게 꼭 그렇게 해야만 하는지. 다른 사람들도 또 저런다, 원래 그런다면서 그 팀장 별로 안 좋아해요."


"음..."


"근데 3개월만 있으면 육아휴직 들어간대요!"


"오! 그럼 3개월만 버티면?"


"그쵸! 그래서 버텨보려구요. 참 그리고 지난번에 저더러 뭐 써보라고 하셨잖아요."


"잘한 거요."


"네. 그거 너무 좋은 것 같아요! 쓰다 보니까 저는 해 온 것도 많고 하는 것도 많고 잘하는 것도 점점 있더라고요!"


"그래요?"


"생각해 보니까 그런 거는 써 본 적이 아예 없더라고요. 쓰다 보니까 말씀하셨던 것처럼 나를 관찰하게 되고 내가 이런 사람이구나 알게 되고 뭔가 자신감도 막 생기고 기분 좋게 자기 시작했어요. 물론 다음날 그 팀장을 보게 되면 기분은 여전히 별론데 음... 그걸 쓰기 전과는 다른 하루로 마무리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하나 더 생긴 게 있는데요. 퇴근 전에 오늘 한 것도 적어보고 있거든요? 하는 것 없이 하루가 가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적다 보니까 하는 일이 되게 많더라구요. 오늘도요!"


"너무 좋은 소식이네요. 고마워요. 이런 소식."


가슴 한편이 되게 뭉클하면서 뭔가 뿌듯했다. 내가 한 것이라고는 쓰라고 한 게 전부였는데 그거 좀 썼다고 처음 대화 나누었을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자신에 대해 말하고 스스로 한 가지를 더 깨우쳤다는 게 참으로 대견스러웠다. 어쩌면 우리 쁨이와 두 살 터울이라 더 마음이 갔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쁨이도 언젠가는 직장인이 될 텐데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내려놓지 않고 잘 이겨내길 바란다. 그녀는 뒤이어 두 사람의 이야기를 더 꺼냈다.


"근데요. 저보다 한 살 어린애가 있거든요. 고등학교 후밴데 9급이에요. 그 애 언니는 저랑 같은 고등학교 동창이고 친구예요. 그런데 어느 날 밤에 그 애 언니한테 전화가 왔어요. 그 애가 직장 일을 너무 힘들어한다고요. 그게 제 잘못은 아니잖아요. 그래서 그걸 왜 니가 말하냐. 앞으로는 걔한테 직접 말하게 하라고 했어요. 말은 웃으면서 했지만, 어이가 없었어요. 제가 직장 일로 힘들어한다고 저희 엄마가 직장 동료나 상사에게 그런 전화를 하지는 않으니깐요. 보통 그렇잖아요. 그리고 걔는요. 성격이 내향적이라고는 하는데 어른들이 보면 버르장머리가 없다고 할 정도로 언행거지가 좀 그래요. 뭘 물어보면 찾아보세요! 검색해 보세요! 이런 식이고 본인이 했던 업무가 저는 처음이니까 뭐 하나 물어볼 때면 전반적으로 다 알려주면 좋을 건데 하나만 알려주고 자리로 딱 가버리고, 또다시 물어보면 하나만 알려주고 자기 자리로 딱 가버리고. 그래서 제가 자꾸 뭘 물어보기가 부담스러워요. 저는 안 그렇거든요. 저는 처음부터 전부 다 알려주거든요. 그리고 또 한 번씩 힘들어 보일 때는 알아서 도와주곤 했는데 고맙다는 말을 안 해요. 본인이 도와달라고 한 적이 없는데 제가 그냥 해줬다 이런 거죠. 아까는 자기 야근인데 같이 밥 먹을 사람이 없다며 저한테 같이 먹자는 거 그냥 와버렸어요. 걔는 그렇게 자기 아쉬울 때만 친한 척을 해요."


"음..."


"그리고 그 애 옆자리에 40대 9급 후배님이 있는데요. 그분이 그 애랑 2년 정도 같이 일해서 친해요. 그래서 제가 그 애한테 뭔가를 지적하거나 가르치면 꼭 그 애 편을 들어요. 버르장머리 없게 하는 행동까지도 어리다는 이유로 귀여워하고.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럴 때마다 너무 짜증이 나요. 솔직히 저도 어리잖아요. 그 애보다 기껏해야 한 살 많을 뿐인데. 그리고 제가 아까 오늘 저녁 같이 안 먹는다고 했댔잖아요? 그랬더니 그 40대님이 내가 같이 먹어줄게! 이러는데. 어휴! 우울해요. 정말."


"움..."


"근데 오늘 그분이 그 애한테 자꾸 받아주니까 점점 버릇이 없어져서 안 되겠는데~ 이러더라고요. 장난처럼. 그래서 이때다! 싶어서 그러니까 자꾸 받아주지 마세요. 버릇 나빠지게~ 그랬어요. 그랬더니 기분이 쫌 낫더라구요."


"아... 혹시 그 40대분과는 대화해 보셨어요?"


"대화는 하죠. 언젠가 어디 같이 다녀오는 길에 이런 말 한 적이 있어요. 나한테도 좀 잘 대해주라고? 나도 그 애처럼 어리다고. 그 애보다 한 살밖에 안 많은데 왜 나한테는 그 애한테처럼 안 하는 거냐고. 선을 긋는 거냐고 선배라서 어려워하는 거냐고. 그랬더니 뭐 그런 건 아닌데 라면서 뭐라고 했었는데 기억이 잘 안 나요."


"음... 그럼, 그 20대분에 관해서는 이야기해 보셨어요?"


"아뇨?"


"40대분과의 관계는 어때요?"


"평소에는 잘 지내요. 그 애 편들 때만 짜증이 좀 나는 거죠. 그 애가 제 말을 더 무시하는 것 같으니깐요."


"그럼... 그분과 이야기를 한 번 해보는 건 어떨까요?"


"어떻게요?"


"그렇다고 내일 당장 급하게는 말구요. 같은 상황이 지금 계속 반복되고 있는 거잖아요. 또 그런 일이 없기를  우선은 바라지만, 만일에 그런 일이 또 반복된다면 그때 잠깐의 시간 텀을 두고 대화를 요청하는 거예요. 심각하게 말구요. 자연스럽게. 부드럽게."


"???"


"그 자리에서 말고 전화나 문자 사내 메신저 같은 걸로 시간 괜찮으면 이야기 하고 싶다며 탕비실이나 카페 같은 둘만의 공간으로 모시는 거죠."


"그래서요?"


"그냥 푸름씨 심정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애랑 함께한 시간이 나보다는 한참 길어서 챙겨주고 싶은 좋은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닌데, 내가 그 애한테 뭐라고 할 때마다 당신이 자꾸 편을 드니까 그 애가 내 말을 계속 무시하는 것 같아서 내 마음이 좋지 않다. 그렇다고 편을 들지 말라는 건 아니다. 내가 뭐라고 할 때는 일단은 듣게끔 놔두고 한 시간 정도 그 애가 생각할 시간을 주면 좋겠다. 내가 왜 뭐라고 했는지, 본인이 뭘 잘못했는지, 앞으로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 건지를 생각하는 시간 같은 것. 그러고 나서 충분히 위로하고 격려해 주면 좋겠다. 내 앞에서 바로 그래버리니까 말하는 나는 민망하고 속상하기만 하다. 내 마음도 조금은 생각해 주면 좋겠다. 이런 정도"


"아..."


"혹시 그분 결혼하셨어요?"


"네"


"배우자와 자녀도 있구요?"


"네. 다 있어요."


"가족관계는 어떤 것 같아요?"


"좋아 보여요."


"그럼 예시를 하나 들어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만일에 40대님의 아이가 뭔가를 잘못해서 지적하거나 훈육 중일때 배우자가 편들고 그런다면 어떨 것 같으냐. 그 마음을 한 번 생각해 주라."


"오~ 그거 괜찮은데요! 오오오호"


"중요한 건 분위기인데요. 그분과 싸우자는 거 아니잖아요. 대화하고 싶은 거잖아요. 그 분에게 내 심정을 말하고 싶은."


"네!"


"그럼 대화를 요청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장난끼는 빼고 유쾌한 분위기면 더 좋을 것 같아요. 특히나 그분이 푸름씨보다 나이가 한참 많잖아요. 자칫 잘못하면 그 의도와는 다르게 20대 후배보다 더 버르장머리 없고 싸가지 없는 애로 낙인찍힐 수도 있으니까요. 여기서 유쾌하라는 게 웃으며 떠들라는 말이 아니라 평소와 다름없는 푸름씨의 자연스러운 미소를 말하는 거예요. 싸우자는 건 아니니까요. 그분과 평소에는 잘 지낸다면서요. 그러면서 나의 심정이 잘 전달될 수 있도록 목소리에 무게만 좀 싣는 거죠. 톤이 높아지면 안 돼요. 지금 이런 말들이 어찌 보면 듣기 좋은 말은 아니잖아요. 듣는 사람에 따라 지적질로 느껴질 수도 있는 거니까. 솔직히 지적질이긴 하죠. 난 당신의 이런 태도가 싫으니까 하지 말라 뭐 이런 거잖아요. 그러니까 톤이 높아지면 갑자기 욱하는 감정이 실릴 수도 있는 거고 그러다 보면 아까도 말했던 것처럼 싸우자, 식으로 비춰지거나 괜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으니깐요"


"아... 좀 어렵네요..."


"어렵죠? 어디까지나 이건 내 생각이에요. 나 같으면 이렇게 하겠다 이런. 그리고 이런 게 먹히는 사람이 있고 안 먹히는 사람이 있는데 그분과 함께 지내온 푸름씨가 더 잘 알 테니까 잘 판단하시구요. 굳이. 너무 무리하진 말아요."


"해 볼래요! 말을 해야겠다고는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서 계속 못 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선생님 말씀 듣다 보니까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냥 그런 상황이 안 생겼으면 좋겠네요."


"그러니까요."


"오늘도 집에 가시면 잘했다 싶은 것 적으셔야죠?"


"네! 선생님 만나러 온 것 적을 거예요! 오길 잘했어요! 역시!"


우린 그렇게 밤 9시가 넘도록 3시간가량의 긴 대화를 나눈 뒤 웃으며 헤어졌다. 다음에도 기쁜 소식으로 찾아오면 좋겠고. 어디 가나 다 있다는 그런 사람들. 어디서나 흔하게 만날 수 있다는 그런 상황들이 우리가 있는 여기, 그곳에는 좀 없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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