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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자 Sep 16. 2022

시원하게 쌀 수 없는, 변비 같은 퇴사

[챕터] 어쩌면 당신의 일상

어떤 선택이든 아쉬움이나 후회는 남게 되더라.

짜장과 짬뽕 사이에서 했던 선택도,

물냉과 비냉 사이에서 했던 선택도,

아메와 라떼 사이에서 했던 선택도.




"회사를 그만두고 싶을 땐 어떻게 해야 해요?"

취업이란 간절함을 담아 성심성의껏 꾸민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로 합격했던 직장이었는데 이제는 그만 다니고 싶다는 퇴준생이 있다.


사유는 다름 아닌 "그냥 싫증"이라고 했다. 인간관계도 아니고 지나친 업무량, 수준 낮은 복지, 정서에 맞지 않는 환경, 꿈에 그린 연봉 같은 사유들이 아닌 그냥 싫증.


와... 다른 사유지만 나도 몇 개월 안 된 직장의 퇴사를 고민하는 요즘이다 보니 그도 저도 아닌 싫증만 나는 그런 회사는 어떤 직장일지 잠시 궁금했다.


어떤 일에 순서는 있어도 모든 일에 계획이 꼭 필요한 건 아니다. 그렇다고 어쩌면 좋으냐 물어보는 이에게 '다른 것도 아닌 그냥 싫증이라면 내 입맛에 맞는 직장 구하기도 어려운 요즘 나 같으면 그냥 다니겠다. 아님 뭐 평양감사도 나 싫으면 그만이라는데 죽어도 싫다면 어쩌겠냐, 그만둬야지.'라고 무심하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선택의 후회를 줄이고자 내가 주로 사용하는 방법 중 하나를 제안했다. 남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진짜 이유 10가지와 다녀야 할 이유 내지는 후임에게 이 회사를 추천하고 싶은 이유 10가지를 솔직하게 적어보라고.


어떤 선택을 해도 후회는 할 테지만, 그렇게 하면 몇 날 며칠씩 날밤 꼬박 새며 가슴 치는 후회까지는 안 하게 되더라. 소비의 이유를 적다 보면 안 사는 게 더 많아지고 사람과의 인연 또한 유지해야 할 이유와 절연해야 할 이유를 적어 보면 곁에 둘 사람과 곁에 둬서는 안 될 사람이 어렵지 않게 솎아내졌으니까.


퇴준생은 그런저런 이유를 적다 보니 그만두고 싶은 이유보다 다녀야할 이유가 더 많고 크다고 했다. 인간관계도 모두와 원만한 건 아니지만 화를 이기지 못하거나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괴로운 수준은 아니라고 했다. 그냥 좀 지쳐서 쉬고 싶은데 장기 휴가는 낼 수 없는 위치라서 고민했던 거란다.


그러고 보니 남은 카드 할부도 많은데 대책이 없었던 것 같다며 여윳돈 천만 원쯤 모을 때까지는 일단 다녀야겠다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내일 아침에는 오랜만에 동료들에게 모닝커피 한 잔씩 돌릴 거라고 했다. 하마터면 말일 자로 백수 될 뻔했다며, 귀찮아하지 않고 끝까지 상담해 줘서 고맙다고 했다.


직장인이라면 지금 당장, 언제라도 때려치워버릴 사표 한 장 정도는 가슴에 싣고 다니기 마련이다. 보기 드문 싫증 사표. 언제든 그만둘 구질구질한 사표. 치사하고 더러운 사표. 그렇지만 후련하게 내던질 수도, 다시금 수습하기도 어려운. 한낱 낱장짜리 묵직한 사표.


오늘따라 사표가 땡기고, 날이 갈수록 퇴사가 마렵다면 일단 사표 뒷장에 적고 보자.

내가 그 직장에서 누리고 얻는 복지와 보람 그리고 그로 인해 포기하게 되는 상실에 대해.

쉽게 말해 내가 왜 그만두고 싶은지 vs 내가 왜 다녀야 하는지를 열거해 보는 거다.


열거하고 보니 보람보다 상실이 크고, 다녀야 할 이유보다 다닐 수 없는 이유가 더 크다면 용기 있는 선택이 필요하겠다. 어떤 선택이든 아쉬움과 후회는 따르기 마련이니까.


더불어, 이름만 들어도 치 떨릴 정도로 소름 돋고 진저리나는 곳이 아니라면 그 직장을 선택했던 동기와 입사 과정에 대한 입사기를 적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만두지 않는 방향을 선택했을 때 앞으로의 직장 생활은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마음가짐이 초심처럼 우러나기도 하고, 전에 없던 열정과 패기 담대함이 생겨날 수도 있을 테니까.




나도 오늘 상시 대기 중인 사표 한 장을 신발 뒤축에 질질 끌고 출근했다. 하기 싫은 출근. 무거운 발걸음이었지만, 그만둘 이유보다 지금은 안 될 이유가 더 크기 때문에.


이게 좋으면 저건 아니고, 저게 좋으면 이건 꽝인 이놈의 세상사. 이제 좀 살아 봤다고 백 퍼센트 내 입맛에 맞는 직장은 어디에도 없다는 걸 깨달았기에 나는 오늘도 후회없이 때려치울 것처럼 최선을 다해 일하며 주말을 기다린다. 월요일이 되면 으악 소리가 절로 나올 테지만 주말이면 그 마음이 녹아 또 다음 한주가 버텨지니까.


그런데도 퇴사를 결정했다면 꼼꼼하게 메모하고 시원하게 싸세요. 경력증명서부터 퇴직(해촉) 증명서, 급여명세서, 퇴직금 정산명세서, 근로·퇴직 소득 원천징수 영수증, 이직확인서와 혹시 모를 사직서 복사본까지.


서류 한 장, 연필 한 자루 남김없이, '그건 너 쓰세요' 할 것도 없이 완벽하게 챙겨 나가야 나중에 다시 오게 되는 번거로움이 없고 마주하는 불편함을 최소화할 수 있을 테니까.


"I support you who are as precious as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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