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선택이든 아쉬움이나 후회는 남게 되더라.
짜장과 짬뽕 사이에서 했던 선택도,
물냉과 비냉 사이에서 했던 선택도,
아메와 라떼 사이에서 했던 선택도.
"회사를 그만두고 싶을 땐 어떻게 해야 해요?"
어렵게 입사한 직장이었는데 이제는 그만 다니고 싶다는 퇴준생이 고민을 털어놨다.
사유는 다름 아닌 "싫증"이었다. 인간관계도 아니고 지나친 업무량, 수준 낮은 복지, 정서에 맞지 않는 환경, 꿈에 그린 연봉 같은 사유들이 아닌 그냥 딱 싫증 하나라고만 했다. 누군가는 복에 겨운 소리라고 했지만 나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지금에 안주하지 않는 사람일수록 더더욱 그럴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나도 그랬고 지금도 그래서 투잡에 만학도 생활까지 병행하고 있으니까.
"따로 계획이 있는 거예요?"
"계획요? 아직은 뭐 없어요."
그래. 모든 일에 계획이 꼭 필요한 건 아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자기 인생을 책임져야 하는 성인으로서 조금은 신중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두 가지를 적어 보라고 했다. 싫증 외엔 다른 이유가 없다고 했으니 누군가에게 그 회사를 추천한다면 어떤 장점을 들 것인지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회사를 그만두려는 본인의 진짜 심상은 무엇인지에 대해. 어차피 누가 볼 다이어리도 아니니까 솔직하고 담백하게 적어 보라고 했다. 가능하다면 이후의 계획도 세워 보길 바라며.
경험상 그렇게 했더니 가슴 치면서까지 후회한 적은 없었다. 다른 이야기지만 예를 들어 소비해야 할 이유를 적다 보면 안 사는 게 더 많아지고 사람과의 인연 또한 유지할 사람과 절연해야 할 사람이 어렵지 않게 솎아내지기도 했다. 어떤 선택을 하든 어차피 후회는 할 테지만, 나는 일단 적어보는 걸 좋아해서 고민 상담을 하는 이들에겐 그런 방식을 추천한다.
역시 퇴준생에게도 괜찮은 솔루션이었나 보다. 그런저런 것들을 끄적이다 보니 지금은 그만둘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구인 공고를 몇 개 봐 봤는데 지금만 한 직장도 없고 카드 할부 남은 것들도 있고 이래저래 해서 뚜렷한 계획이 생기기 전까지는 그냥 다녀야겠다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내일 아침에는 오랜만에 동료들에게 모닝커피까지 한 잔씩 돌릴 거라며, 하마터면 말일 자로 백수 될 뻔했는데 귀찮아하지 않고 끝까지 상담해 줘서 고맙다고 했다.
직장인이라면 지금 당장, 언제라도 때려치워버릴 사표 한 장 정도는 가슴에 싣고 다니기 마련이다. 보기 드문 싫증 사표. 언제든 그만둘 구질구질한 사표. 치사하고 더러운 사표. 그렇지만 후련하게 내던질 수도, 다시금 수습하기도 어려운. 한낱 낱장짜리 묵직한 사표.
오늘따라 사표가 땡기고, 날이 갈수록 퇴사가 마렵다면 일단 사표 뒷장에 적고 보자.
내가 그 직장에서 누리고 얻는 복지와 보람 그리고 그로 인해 포기하게 되는 상실에 대해.
쉽게 말해 내가 왜 그만두고 싶은지 vs 내가 왜 다녀야 하는지를 열거해 보는 거다.
열거하고 보니 보람보다 상실이 크고, 다녀야 할 이유보다 다닐 수 없는 이유가 더 크다면 용기 있는 선택이 필요하겠다. 어떤 선택이든 아쉬움과 후회는 따르기 마련이니까.
더불어, 이름만 들어도 치 떨릴 정도로 소름 돋고 진저리나는 곳이 아니라면 그 직장을 선택했던 동기와 입사 과정에 대한 입사기를 적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만두지 않는 방향을 선택했을 때 앞으로의 직장 생활은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마음가짐이 초심처럼 우러나기도 하고, 전에 없던 열정과 패기 담대함이 생겨날 수도 있을 테니까.
나도 오늘 상시 대기 중인 사표 한 장을 신발 뒤축에 질질 끌고 출근했다. 하기 싫은 출근. 무거운 발걸음이었지만, 그만둘 이유보다 지금은 안 될 이유가 더욱 크기 때문에.
이게 좋으면 저건 아니고, 저게 좋으면 이건 꽝인 이놈의 세상사. 세상 조금 살아 봤다고 내 입맛에 딱 맞는 직장은 그 어디에도 없다는 걸 깨달았기에 나는 오늘도 후회 없이 때려치울 것처럼 최선을 다해 일하며 주말을 기다린다. 월요일이 되면 으악 소리가 절로 나올 테지만 주말이면 그 마음이 녹아 또 다음 한주가 버텨지니까.
그런데도 퇴사를 결정했다면 꼼꼼하게 메모하고 시원하게 싸 버리자. 경력증명서부터 퇴직(해촉) 증명서, 급여명세서, 퇴직금 정산명세서, 근로·퇴직 소득 원천징수 영수증, 이직확인서와 혹시 모를 사직서 복사본까지.
서류 한 장, 연필 한 자루 남김없이, '그건 너 쓰세요' 할 것도 없이 완벽하게 챙겨 나가야 나중에 다시 오게 되는 번거로움이 없고 마주해야 하는 불편함을 최소화할 수 있을 테니까.
"I support you who are as precious as 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