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과 사랑으로 채우는 공간
- 소설 ‘빛이 이끄는 곳으로’ 리뷰
선물 받아서. 베스트셀러라서. 남이 추천해 줘서. 좋아하는 작가라서.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과제나 일 때문에) 읽어야 해서.
책을 고르는 방법은 많지만 나는 주로 추천받은 책을 선호하는 편이다. 좋아하는 작가가 추천했거나, 독서를 즐기는 지인의 추천을 받았거나, 북 인플루언서의 '진심이 담긴' 후기를 봤을 때 1단계를 통과하는 셈이다(좋아하는 사람끼리는 취향도 비슷해서 이렇게 고른 책들은 대부분 실패하지 않는다).
도서관 앱에 '대출 가능' 상태 거나 '밀리의 서재'에 있는 책이라면 단번에 2단계도 통과다. 꼭 봐야지 생각했던 책도 2단계를 넘지 못하면 반 정도는 잃어버리고 잊히고 만다.
3단계까지 오면 일단 십 여분은 읽어본다. 사실 책의 제목이 있는 앞표지와 추천사가 있는 뒤표지, 작가의 말, 목차까지만 봐도 대충 감이 온다. 나와 맞는 책인지 아닌지. 하지만 첫인상이 별로였어도 의외로 괜찮은 책도 있기 때문에 긴장을 놓지 않는다. 그러다 보면 포기할 책, 끝까지 읽을 책, 필사도 하고 싶은 책, 소장하고 싶은 책으로 나눠지게 된다.
책의 뒷표지 (출처 : 교보문고) 이 책은 나의 일반적인 방법에서 조금 벗어났다. 연말에 한창 바쁠 때 추천받자마자 도서관 앱에 예약해 놓고, 순번이 돌아오길 한참 기다린 후 해를 넘겨서 받느라 누가 추천해 줬는지 기억을 더듬어 봐도 흐릿하다. 도서 도착 알림 메시지를 받고서야 '아, 내가 이것도 예약했구나!'하고 알았을 정도니까. 마침 읽고 읽던 책이 집중해서 읽어도 쉽게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아 머리를 식힐 겸 이 책을 펼쳤다.
'작가가 건축가라고? 이것도 어려운 내용 아냐?'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지만 프롤로그를 읽자마자 순식간에 나는 파리의 어느 고택 앞에 서 있었다.
시테 섬의 낡은 저택나는 파리에 산다. 길을 지나다가 문득 아름다운 집을 볼 때마다 그 집의 우편함에 편지를 적어 넣곤 했다. “당신의 집에 담긴 이야기를 듣고 싶은 한 건축가로부터……” 간혹 편지에 대한 답장으로 집에 초대를 받았고, 그 집에 숨어있는 신비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 수많은 파리의 저택에 발길이 닿았고 그 이야기가 모여 한 권의 책이 되었다.
건축에 관해서라면 이사 오면서 했던 아파트 인테리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모르지만, 공간의 생생한 묘사는 파리의 사연 많은 주택이나 스위스의 비밀 품은 병원의 모습을 직접 경험하는 것처럼 실감 나게 했다. 바람이 스쳐가는 느낌, 먼지가 부유하는 풍경, 햇볕이 내리쬐는 따스함. 책에 작가의 그림이 종종 나와서 묘사의 시각화를 돕기도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차원을 뛰어넘는 감각이 느껴졌다. 책을 읽으며 나는 빛이 이끄는 대로 뤼미에르도 됐다가, 프랑스와도 되면서 그들의 생각을 공유하고 비밀을 찾고 기억을 더듬었다.
비밀을 가진 소품들p.84 길은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대상이 무엇이든 흐르게 해주는 것이었다. 숲 속을 걸을 때도 가끔 멈추어 지나가는 바람을 온몸으로 맞이하지 않는가. 그것은 우리가 바람이 다니는 길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p.330 건축가가 조금 부족한 공간을 만들면 그곳에 사는 사람이 나머지를 추억과 사랑으로 채운다는 겁니다. 그때 비로소 건축이 완성됩니다.
p.343 "아버지는 어린 제게 이상한 말씀을 해주셨는데 이제는 조금 이해가 되네요. 바니시 칠이 마르기 전에 소중한 것을 놓아두면 책상이 그걸 평생 기억해 준다고요."
그의 말을 듣는 순간 역시나 프랑스와 왈처는 기술이나 기능적으로만 사물을 본 것이 아니라 그 사물에 영혼을 담는 방법을 알았던 사람이었음을 다시금 깨달았다. 아마추어의 책상이라 생각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프랑스와를 통해서 느낀 것은 불편하고 부족해 보이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어쩌면 저마다의 깊은 사연을 담고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유명한 건축물들은 그 역사와 전통만큼이나 나름의 사연을 가지고 있겠지만, ‘공간’에 대한 소중한 추억 또한 누구에게나 있다. 그곳의 웅장함, 위대함, 찬란함은 추억을 이루는 데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아마추어의 책상’ 같은 사소한 물건이라도 그 안에 품은 사연은 대서사시 못지않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 기억의 가치는? 당연히 셈할 수도 없다.
p. 356 그들에게 내가 이야기를 책으로 출간하려 한다고 말했을 때, 그들은 마치 배신자를 바라보듯 했어. 나에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해준 것은 나를 믿었기 때문이라고. 그것은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그런 가십거리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속에 새겨진 소중한 추억이라고. 절대로 자신의 이야기를 쓰지 말라고. 그나마 간신히 설득한 끝에 이야기에 나오는 지명과 주인공의 이름을 바꿔서 쓰는 것에 동의했지.
작가가 독특한 방법으로 수집한 이야기들은 비밀의 옷을 입고 한데 어우러지더니 '진짜 집의 이야기'가 되었다. 물론 자신의 소중한 이야기를 말해준 화자들의 공도 크지만, 이들을 촘촘하게 엮어 글을 풀어나간 작가의 필력에도 감탄했다. 본업인 건축도 잘해서 아시아인 최초로 큰 상도 받았다면서 글까지 이렇게 잘 쓰다니 이건 정말 ‘사기캐릭터’ 아닌가 싶다. 그래도 좋다. 덕분에 올해 초부터 굉장히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했으니! 이 책은 소장하고 싶은 책이다. 소개한 몇몇 구절은 필사도 했고, 지인들에게 추천도 했다.
작가와 빛이 이끄는 대로 파리지앵들의 비밀스러운 추억을 공유하고 따뜻한 사랑의 기억을 함께 나누고 싶다면 이 책만큼 완벽한 소설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