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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스텔라 Jan 24. 2024

나의 신 포도

'신 포도' 하자마자 이솝우화가 떠오른 당신. 

맞다. 높은 나무 위에 있는 포도를 먹을 방법이 없자 “저건 맛없는 신 포도일 거야” 하고 지나친 여우 이야기에 나오는 그 ‘신 포도’. 

이솝우화에서 여우는 부정적인 대상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고 신 포도와 관련된 우화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여우뿐만 아니라 평범한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신 포도'는 있지 않을까? 



나의 '신 포도'는 ‘영어’다. 초등학교(사실 나는 국민학교 세대지만) 때부터 영어공부를 했으니까 족히 삼십여 년이 넘게 가느다란 공부의 끈을 잡아오고 있음에도 여전히 나는 영어가 무섭고 두렵다. 물론 잘하지도 못한다.

여우가 처음부터 포도나무를 못 본 척 지나간 것이 아니고 어떻게든 먹어보려고 뛰기도 하고 궁리도 한 것처럼 나도 영어와 친해져 보려고 안 해본 일이 없었다. 팝송도 들어보고(가사는 대충 얼버무리고 음만 흥얼거린다), 잘생긴 외국배우가 나오는 영화도 보고(배우 얼굴만 보게 되더라), 영어 공부 성공 후기가 수두룩한 유명 시트콤도 다운로드하여 보고(아니, 이게 왜 재미있다는 거지? 난 미국 정서랑 안 맞나 보다). 이것저것 시도하다 모조리 실패하고 안 되겠다 싶어 돈의 힘을 빌려 과외도 받아보고 학원도 다녀보았다. 이 정도면 내 수준에서 할 수 있는 노력은 다 해본 것 같은데도 좀처럼 입에서 하고 싶은 말이 나와 주지 않았다. 

 밥줄이 걸리면 좀 나아질까 싶어 외국계 회사에 입사해 보았으나 매일 하는 말만 하고 듣는 말만 들리고 유창함과는 거리가 먼 하찮은 수준으로 겨우겨우 버티는 날들이었다. 몇 마디 대화하다 못 알아듣겠다 싶으면 아예 통화 품질이 안 좋다는 핑계를 대며 이메일로 내용을 보내달라는 식의 꼼수만 늘어서 결국 퇴사할 때까지도 내 영어 실력은 입사 전에 비해 10g 정도 늘었나 싶다.

출산과 육아를 거치면서 그나마 했던 영어 실력도 퇴화할 즈음, 아이들을 어릴 때부터 영어에 친숙하게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나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아이에게 영어 노래를 들려주며, 영어 영상을 보여주며, 영어 동화책을 읽어주며 '엄마표 영어'를 한답시고 노력했으나, 역시나 별다른 효과는 보지 못했다. 그래도 아이들은 엄마처럼 영어를 두려워하지는 않으니 그걸로 위안을 삼아야 하나.

사실 지금도 매일 5분~10분씩 영어 공부를 하긴 한다. 너무 소소하지만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하는 맘 반, 이게 도움이 되기는 하려나 의심하는 맘 반을 가지고. 


 여우가 어떻게 했어야 포도를 먹고 그 달콤함을 느낄 수 있었을까? 나도 어떻게 했어야 능숙하게 영어를 듣고 말하며 쓸 수 있었을까? 그깟 영어가 뭐라고 하며 돌아서고 싶다가도 마음 한편에서는 계속 바이링구얼을 꿈꾸는 나. 여우처럼 과감하게 포기할 줄도 모르고 그렇다고 영어 공부에 올인할 용기도 없는 난 나무 밑에서 언제쯤이면 포도 한 알 안 떨어지나 목 빠지게 기다리며 침 흘리고 있는 바보인 것 같아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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