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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이 Aug 09. 2023

필요악은 필요한가

조직 내 혼돈과 질서, 그리고 선과 악에 관한 군인의 생각


모든 구성원이 계급이나 서열 없이 자유롭고 평등한 수평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조직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 조직은 초기에는 완전무결한 '선'의 상태로 보인다. 그러나 구성원 간의 완전한 자유와 평등은 피치 못할 혼돈을 야기한다. 혼돈은 곧 질서를 요구할 것이고 질서를 세우기 위해서는 혼돈을 야기한 자유, 평등과 대조되는 통제가 필요하다. 여기서 자유와 평등이 선이 대응된다면, 통제는 악에 대응된다. 다시 말해 조직 내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통제라는 '악'이 '필요'하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통제의 조건이다. 통제는 상호 간의 수직적인 관계가 형성되어 있을 때 가능하다. 다시 말해서 혼돈이 발생한 조직 내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유롭고 평등했던 조직 구성원 사이에 수직적인 관계, 즉 계급과 서열이 생겨야만 한다.

(사진 출처 : 그로우앤버터)

내가 1년 가까이 몸담고 있는 조직이 있다.


바로 '군대'다.


군에 입대한 이후 훈련소, 후반기 교육대, 보충중대, 그리고 약 9개월간 시간을 보낸 자대까지 다양한 집단에 소속되면서 다양한 사람을 만났다. 대학생활을 하게 되면 어느 기점을 이후로 대부분 비슷한 유형의 사람을 반복해서 만나게 되지만, 군대에서는 태어나서 처음 보는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과 같이 먹고 자며 생활하게 된다. 평소에도 사람 관찰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사람 공부한다고 생각하며 군대에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관찰했다. 그런 뒤 그 말과 행동에 담긴 그 사람의 심리를 생각해 보면서 그 사람의 성향과 함께 그러한 말과 행동을 하는 동기를 추론해 보았다.


이는 내가 평소에도 관심 있는 사람을 관찰할 때 종종 하는 일이지만, 나는 이를 확장해서 조직 전체에 적용해 보았다. 제삼자의 입장에서 내가 속한 조직을 관찰해 보는 것이다. 이따금 군대에서는 사회였다면 이해하지 못할 만한 상황이 많이 발생한다. 그럴 땐 제삼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군대라는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한 상태에서 제삼자의 입장에서 같은 상황을 바라보면 왜 이 조직이 이렇게 행동했는지, 왜 이런 결과가 발생했는지 이해가 되는 경우가 있다. 가끔은 이해를 포기하는 게 속편 할 때도 있지만, 궁금증이 풀리지 않는다면 이러한 방법을 사용해 볼 수 있다.


내가 자대에 오기 약 몇 주 전 선임들이 '악마'라고 칭하던 사람이 전역을 했다. 때문에 선임들은 나에게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줬고, 그 사람이 떠난 이후로 그 사람과 그와 비슷한 세대들이 했던 악습이나 과한 통제는 본인들의 세대에서 없어졌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통제가 상대적으로 감소하고 자유도가 증가한 것이다.


그리고 내가 전입온 뒤 병력 부족 등의 문제로 약 7개월 간 우리 분대에 내 후임이 들어오지 않았다. 다른 분대도 4개월, 5개월 간 신병이 들어오지 않게 되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7개월 만에 신병이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고 서두에서 말한 통제와 악이 필요해지는 상황이 도래하는데, 내가 최대한 제삼자의 입장에서 바라본 그 과정을 설명하면 아래와 같다.


7개월 간의 질서

7개월 간 신병이 없었지만,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전역을 해서 나가는 인원을 제외하고는 구성원의 별다른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신병이 오기 직전에는 상병과 병장들밖에 없었다. 짧게는 반년에서 길게는 1년 넘게 같은 업무를 수행한 베테랑들이기에 귀찮아하긴 해도 업무는 너무나도 잘 돌아갔다. 그러나 신병이 들어오며 문제가 발생한다.


혼돈의 씨앗

신병, 즉 새로운 인물은 조직 내에 들어온 혼돈의 씨앗이었다. 이제 막 전입 와서 1달간 교육받은 신병에게 최소 7개월에서 길게는 1년을 넘게 생활한 선임들과 같은 업무 능력을 요구하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시간이 지난 후에는 이를 이해할 수 있었지만 7개월 간 질서 속에 살아왔기에 처음에는 그런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혼돈이 요구한 질서와 통제, 그리고 필요악

신병들이 업무에 투입되면서 나오지 않던 실수가 계속해서 발생하게 되었다. 업무 투입 초기에 발생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상황이지만, 7개월간의 질서에 익숙해졌던 선임들은 이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웠고, 혼돈에 빠져 과거의 질서를 그리워하게 된다. 그리고 한 명이 군기반장을 자처했다. 전역한 '악마'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제 통제는 없을 것이라 했던 선임들이 다시 통제를 시작한 것이다. 신병들에게 기존에 있던 선임들과 본인들의 계급 차이를 인지시키고, 생활 일부에 통제를 걸기 시작했다. 나도 일부 통제를 걸었다. 질서를 유지하겠다는 명목이었다.

물론 지난 시절만큼의 심한 통제는 아니었다. 그러나 군기반장을 자처한 선임이 이에 관해 나에게 한 말은 나에게 생각할 거리와 함께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를 만들었다.


"00야, 필요악은 필요한 것 같다."


군대의 예시를 통해 질서가 유지되던 조직 내에 발생한 혼돈과 이를 해결하고 질서를 되찾기 위해 수직적 관계에 기반한 통제가 가해지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그러면 여기서 질문을 하나 해보겠다.


필요악은 과연 필요한가?


나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단, '특정 조건 하에서 한시적으로 필요하다'고 본다.


어떠한 조직도 질서가 항상 유지될 수는 없다. 유지되던 질서 속에서 불가피하게 혼돈이 발생하면 이때 '필요악'이 개입해야 한다. 필요악이 개입하여 눈에 보이지 않던 수직적인 관계가 드러나고, 이를 기반으로 적절한 통제가 이루어지면 조직은 질서를 되찾는다. 그러면 필요악은 이제 그 역할을 다한다. 그 이상의 필요악의 개입은 불필요하다. 그렇게 다음 혼돈이 발생할 때까지 이 조직은 질서를 유지하게 될 것이다.


혼돈과 질서는 항상 반복되어 나타난다. 그리고 나는 이 과정 속에서 조직의 발전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질서 속에 있는 조직에서 새로운 구성원이나 새로운 생각이 혼돈을 만들고, 다시 통제를 통해 질서를 찾아가면서 혼돈은 조직에 자연스럽게 융화된다. 변화 없는 조직은 발전할 수 없다. 변화로 말미암은 혼돈과 이를 바로잡는 질서를 통해 조직은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필요악은 빠질 수 없는 필수 요소이다. 필요악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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