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집이니? 시간 되면 아파트 후문 앞 인공폭포에서 보자”
아이들의 수술놀이 이후 서서히 거리를 뒀던 엄마와 1년 만의 대면이었다.
엄마라는 글자만 봐도 손이 떨리고 숨이 막혔던 시간, 난 어느 순간부터 부모님을 피하기 시작했다. 같은 아파트, 같은 동, 같은 라인에 한 층 건너 위아래 집에 살면서도 연락드리기는커녕 마주칠까 무서워 피해 다녔다. 아파트 단지 내 운동시설에서 엄마의 뒷모습이라도 보면, 운동을 포기하고 집에 돌아오기도 했다. 엄마를 만나면 내 아이와 언니네와의 관계에 대해 한 소리 들을 것만 같아 두려웠기 때문이다.
명절 때는 ‘우리 가족 앞에 모습을 보이지 말라.’는 형부의 말을 존중하여 전국 각지로 여행을 다녔고, 부모님 생신 때에는 건조한 카톡 메시지로 축하를 대신했다. (몸은 여행지에 있었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다.)
부득이하게 만나야 할 일이 생기면 아이들을 부모님 댁으로 올려보내 일을 해결했다. 엄마의 칠순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엄마를 단 둘이 만나기로 한 것이었다.
엄마를 만나기로 한 시각이 다가오자 심장은 요동치고 안절부절못했다.
“너 왜 엄마를 피하니? 애들 문제로 언니네가 불편한 건 알겠는데, 우리가 뭘 잘못했다고 우리한테까지 불똥이 튄 거냐? 할 말 있으면 해 봐라.”
이렇게 시작된 대화는 4시간 넘게 이어졌다.
나는 아이들의 수술놀이를 바라보는 엄마의 편파적인 시각과 첫 출산 후부터 불편했던 친정식구들에 대한 이야기, 유년시절 부모님으로부터 받았던 체벌의 기억과 감정을 처음으로 입 밖에 내놓았다.
나의 첫 임신소식에 엄마의 첫 반응은 “아들이어야 할 텐데,”였다. 그 말에 나는 너무 속상해서 엄마와의 연락을 한동안 끊었다.
엄마는 맏며느리의 자리에서 6년간 딸 셋을 낳아 시부모님으로부터 많은 스트레스를 받으셨다. 아빠는 셋째인 내 동생이 딸이라는 사실을 아시고는 ‘하늘이 노래졌다.’라고 하셨을 정도였는데, 비슷한 입장의 내가 걱정돼하셨던 말씀이었다.
나의 시아버지는 장남이시고, 남편의 형 내외가 계시지만 자녀계획이 없으시기에 우리 부부의 첫째가 시댁의 첫 손주가 되는 셈이었다.
엄마의 경험에서 우러난 마음은 이해했지만, '이미 임신한 것을, 성별도 결정되어 있는 것을, 굳이 딸에게 이야기해야 하는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나의 신혼집은 친정집에서 도보 10분 거리에 있었는데, 첫 출산을 한 달 앞두고 부모님이 한강 건너 1시간 거리의 지역으로 이사를 가셨다. 부동산 계약이라는 것이 어쩔 수 없는 것을 알면서도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서운했던 것은 이사 가신 후에도 우리 집 근처에서 지인 모임이 자주 있었음에도 우리 집에는 오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끔, 반찬 주러 오신다고 연락을 받으면 엄마 만날 생각에 마음 부풀어 있던 나는 실망을 거듭해야만 했다. 매번 반찬을 현관문 앞에 두고 가셨던 것이다.
그럼에도 ‘나 같이 아이들 안 좋아하는 사람도 M은 그렇게 보고 싶더라.’라며 Y보다 불과 15개월 먼저 태어난 엄마의 첫 손자인 동생 아들을 보기 위해 동생 집에는 종종 가셨다. 나와 가끔 만나서도 첫 손자와 놀았던 일과 그 과정 중에 느꼈던 M의 기특함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 (Y와는 함께 한 시간이 없으니 Y에 대한 이야기 소재가 없으신 거라고 생각했다.)
그 외에도 무통주사 없이 자연분만했을 때의 진통보다 더 아프다고 느꼈던 유선염에 걸려 40℃ 가까운 고열과 통증으로 고생하고 있는 나에게 은행 다녀오는 심부름을 시키셨던 것, Y가 7개월 무렵부터 1년이면 서너 번씩 입원해 몸과 마음 모두 지쳤지만 친정은 왠지 모를 거리감이 느껴져 마음 둘 곳 없이 외로웠던 것 등등 수년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어 마음 깊숙이 꾹꾹 눌러 놓았던 말들을 모두 쏟아내니 카타르시스가 느껴졌다.
하지만 그동안 쌓였던 울분이 풀린 나와는 달리, 엄마는 처음 듣는 이야기에 충격을 받으신 듯했다.
“그럼 엄마, 아빠가 어떻게 했어야 했니?”
“부모니까! 엄마, 아빠가 다 끌어안아 줬어야죠! 보듬어 줬어야죠!”
영유아 때는 키우기가 꽤나 까다로웠어도 아동기 이후로는 말썽 한 번 피우지 않고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자란, 부족함 없이 키운 딸의 말에 엄마는 서러움의 눈물을 쏟으셨다. 엄마가 우시는 모습은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25년 전, 친할아버지가 돌아가신 15여 년 전 이후 처음 보았다. 하지만 엄마에 대한 내 마음은 거칠고 단단한 돌처럼 굳어져 어떠한 동정심이나 미안한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그리고 이어진 엄마의 이야기.
“내가 손주들을 차별했다는 건 네 오해다. 모두 다 똑같은데, 네가 그렇게 느꼈다면 미안하다.
그리고 나도 유선염 겪었지. 나 때는 그냥 견딘 거지, 마사지받으러 다니고 그런 게 있었나? 난 네가 가슴 마사지받으러 간다고 하길래 세상 좋아졌다 생각했지 뭐.
그리고 내가 이 이야기는 아빠한테도 한 적이 없는데 네가 이런저런 이야기 다 했으니 나도 한다.
너 첫 출산했을 때 네 회사에서 과일바구니가 많이 들어와서 그냥 두면 금방 상할 것 같은 과일 몇 개 챙겨가도 되는지 너한테 묻고 배, 골드키위를 비닐에 담아뒀지.
근데 좀 있다가 C서방이 와서 비닐 안에 골드키위를 빼놓더라? 내가 그 순간 너무 화가 나는 거야.
너도 알다시피 내가 딸, 사위한테 도움을 주면 줬지 손 벌릴 생각도 전혀 없고 단지 과일이 상해서 버려질까 봐 몇 개 챙겨둔 건데 그걸 빼더라?
그것도 골드키위가 비싼 철이라 그런지 제일 비싼 골드키위만 딱! 빼는데 그 순간 내 얼굴이 화끈거리고, 내가 그 이후 너네 집에서는 물 한 잔도 안 얻어먹는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가능한 너네 집은 안 갔던 거고, 반찬 줄 것 있으면 현관문 앞에서 전해준 거다.”
내 머릿속에는 한 조각의 기억도 남아있지 않은 전혀 예상치 못한 엄마의 이야기, 7년간 엄마 혼자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이야기를 들으니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내가 느꼈던, 뭔지 모를 엄마와의 거리감이 결국 사실이었고 그 이유가 ‘골드키위’ 때문이라니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꽁꽁 숨겨져 있던 비밀이 이제야 풀린 기분이었다.
그리고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
‘엄마는 내가 예민하고 소심하다고 하지만, 결국 난 엄마를 꼭! 닮았다’는 것을. 이 사실을 엄마는 모르시는 것 같다는 것을.
그리고 그날 밤, 엄마와 나를 거리 두게 한 사건의 당사자인 남편에게 이야기해야 했다. 하지만 사건의 전말이 너무 어이가 없어서 이야기하기도 부끄러웠으나 왜 그랬는지 알아야만 했다.
이야기를 들은 남편 또한 그런 일은 기억에 없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더니 입을 열었다.
“전혀 기억이 안 나긴 하지만 그런 상황이 다시 생겼다고 가정해 본다면 다른 큰 과일들과 골드키위가 부딪힐까 봐 키위를 따로 꺼내놓을 것 같은데...... 그리고 장모님이 가져가시려고 한 것을 몰랐으니 그랬겠지. 내가 설마 알고 그랬을라고?”
“아!”
남편 이야기를 듣고 보니 남편의 성격 상 그럴 법했다. 이 점이 시어머니와 엄마의 차이라는 것을 결혼 초부터 분명히 느꼈었다. 과일을 예로 들면, 엄마는 사과 배 등 종류 상관없이 커다란 비닐봉지 한 곳에 넣어 주시고, 어머니는 사과 한 개 한 개, 배 한 개 한 개 따로따로 키친타월이나 비닐에 싸고 과일종류 별로 비닐에 또 담아 튼튼한 쇼핑백에 넣은 후 과일이 쏟아지지 않게 쇼핑백 손잡이도 단단히 묶어 주셨다. 남편도 어머니의 모습을 꼭 닮아, 여행짐을 쌀 때에도 짐을 별개포장해서 싼다.
크고 단단한 과일들 사이에서 골드키위가 부딪혀 깨질까 염려돼 꺼내놓았을 것이라는 말은 매우 신빙성 있었다.
골드키위로 인한 오해가 이렇게 큰 참사를 불러오다니, 참 우습고도 슬픈 상황이라 사건의 당사자인 남편이 엄마에게 직접 소명할 필요가 있었다.
다음 날 밤, 아이들을 재우고 우리 부부는 참으로 오랜만에 부모님 댁에 올라가 골드키위 사건에 대한 해명을 했다.
나와 남편의 토로가 부모님과의 진지한 토론으로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이었지만, 대화는 엄마와 내가 인공폭포 앞에서 했던 이야기 안에서 계속 맴돌 뿐, 각자 내가 더 서운하다고 할 뿐,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남편이 골드키위를 비닐봉지에서 빼는 모습을 본 즉시 엄마가 “C서방, 그거 내가 가져가려고 담아둔 거야.”라고 한 마디만 했다면 그 이후부터 현재까지 나의 삶은 어떻게 전개됐을까? 엄마와 거리감도 안 생겨 출산 후 쓸쓸함도 안 느끼고 조금 더 건강한 내가 되지 않았을까?
부질없는 상상이지만, 영화 <어바웃 타임 (2013)>에서와 같이 어떠한 순간을 다시 살 수 있다면, 난 이 순간으로 돌아가 엄마의 오해가 안 생길 상황으로 바꾸고 싶다.
Bad things happen,
and you can’t do anything about it, right?
과거는 흘러갔고, 어쩔 수 없는 거야, 그렇지?
- 영화 <Lion King (1994)> 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