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씨가 된다는 게 이런 건가보다.
내가 다니던 두 번째 회사 근처 미술관에서 전시를 보던 중 찍은 사진을 개인 소셜 플랫폼에 업로드했다. 그 사진 밑에 친하게 지내던 전 직장 동료가 댓글을 달았다. "큐레이터 같아요!" 나는 댓글에 답글을 달았다. "이렇게 직업을 바꿔봅니다.. ㅋㅋ"
농담 반 진담 반처럼 했던 이야기였다. 농담이었던 건 미술은 그저 취미였을 뿐 업으로는 나와 절대 닿을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진담이었던 건 무엇인지 모를 꿈을 찾아 그걸 이루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7년 전 장난처럼 했던 말은 어느 순간 소망이 되었고, 그 소망은 반은 현실이 되었으며 반은 아직 미래 속에 있다.
'그래서 그들은 언제까지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류의 이야기를 좋아했다. 주로 전래동화나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나올법한 이런 결말을 좋아했던 이유는 내 인생의 종착지가 행복일지 아닐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실은 과정 속에 있는 많은 나날들이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 행복할 이유도 많았지만 행복하지 않을 이유도 많았다. 행복은 닿을 수 없는 것, 내 손끝 저 멀리에 있는 것 - 그렇기에 내가 폴짝 뛰어올라야지만 쟁취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꿈을 찾고자 했던 것도 궁극적으로는 행복해지기 위해서였다. 꿈을 찾고 그 안에서 나를 찾고 이렇게 하다 보면 나는 걸어도 걸어도 보이지 않는 행복이라는 것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직은 과정 속의 이야기이다. 과정을 굳이 이야기하는 것은 살아가고 있는 순간순간을 존중하고 소중히 여기기 위해서이다. 저 멀리 빛나고 있던 꿈에 다가간 대가로 이카루스의 날개가 되어버렸지만 다시 일어나서 내게 주어진 순간을 충실히 살아가기 위해서이다.
출퇴근길 역사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 늘 의아했다. 저 많은 사람들은 무얼 향해 저리도 바삐 움직이고 있을까. 저 무표정 뒤에는 어떤 생각과 감정들이 숨어있을까. 나도 모르게 정해진 하나의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는 걸까 아니면 그 속에서도 나의 이야기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걸까. 속에 드리우진 이야기가 궁금했다. 그래서 내 속에 들어찬 이야기를 꺼내보기로 했다. 개별성이 보편성을 획득하는 것이 예술이라면, 예술계 종사자인 내가 할 수 있는 건 조심스럽게 내 이야기를 꺼내어 사람들 속 각 이야기의 면면에 닿아보는 시도를 하는 것이었다.
아직은 과정 속의 이야기. 끝을 알 수 없어 더욱 주저앉을 수 없는 나만의 이야기가 당신에게 닿길 바란다. 혹여나 닿지 않는다면 그건 나의 미숙함일 것이다. 그렇지만 글을 쓰고 싶었을 때부터 입버릇처럼 한 이야기가 있었다. 단 한 명이라도 내 글에 귀 기울여주는 사람이 있다면 행복할 거라고. 나의 너무도 미시적인 이야기가 당신 안의 사소하지만 숨겨져 있는 반짝임과 마주하게 되길. 우리 모두의 과정은 반짝거리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