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자연에 미안함을 느끼는가?
어느 날부터인가 자연에 부채감을 갖고 있었다. 미안했다. 인간이라서 그저 미안했다.
그래서 물었다. 나는 왜 자연에 미안함을 느끼는가?
관리되지 않는 습기 낀 벽면은 어김없이 곰팡이의 서식지가 된다. 시퍼렇게 영역을 확장하는 곰팡이를 보며 나는 모든 생명이 곰팡이처럼 공기 중의 어떤 입자로부터 생성되는 장면을 상상했다. 그래서 나는 그 혹은 그녀를 소환했다. 나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로 쭉 올라가, 내 존재의 씨앗. 입자로부터 영문도 모른 채 생성된 어떤 인간, 태초의 내 조상을 말이다. 우리는 서로를 모르지만, 그래도 그 혹은 그녀로부터 내가 느끼는 부채감의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조상 J(내가 임의로 만든 이름)에게 묻는다.
E : J님. 안녕하세요.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J : 네. 뭔가요?
E : 당신은 왜 태어났나요?
J :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태어나보니 저였죠. 태어나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은 아닙니다.
E : 곰팡이도 그냥 태어난 거 같은데, 곰팡이가 사람과 같다고 생각하세요?
J : 곰팡이는 곰팡이의 일을 하고, 사람은 사람의 일을 하죠. 원리는 같습니다. 영역을 확보하기 위해 전투적으로 노력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서는 모든 생명이 다 같아요.
E : 저는 자연에 미안함을 느낍니다. J님도 그래요?
J : 글쎄. 그럴 이유가 있나. 곰팡이는 누구에게든 어떤 미안함도 느끼지 않을 텐데요.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니잖아요. 앞에서 모든 생명이 다 같다고 말씀드렸죠. 사는 것도 힘든데 왜 미안함을 느껴야 하죠? 그러니까 제 말은, 무슨 일이 일어났건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에요.
E : 어쩔 수 없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게는 수명이 있다. 거대한 생명체인 지구도 예외는 아니다. 지구는 언젠가 죽는다. 죽음 후 새 생명을 얻는다 하더라도 다시 태어난 지구에 나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기후재난으로 지구의 온도가 올라가는 것은 그저 지구가 늙었기 때문이다. 물론 본래 더 오래 살 수 있었던 지구의 수명을 인간이 단축시킨 것이긴 해도. 과정이야 어찌되었건, 이제는 되돌릴 수가 없다. 이미 많이 늙었으니까. 지구는 언젠가 죽는다. 그것만이 명백한 진실이다.
E : J님 말이 맞아요. 자연에 미안함을 느껴야 할 이유는 없는 것 같아요. 제겐 환경을 파괴하려는 의도도 없는걸요.
J : E님.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봐요. 자연에 미안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인간이라는 게 싫었던 것 아닌가요? 자연을 파괴한 건 인간이죠. 하지만 인간을 경멸하거나 벌할 수는 없으니, 대신 지구에게 미안해하기로 한 게 아니냐는 거죠...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E: 뭔가요?
J : 만약 당신에게 인간이 아닌 다른 동물로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인간이기를 포기할 건가요?
E : 아뇨. 인간으로 살아보지 않았다면 몰라도, 37년을 인간으로 살아왔는데 이제 와서 그렇게는 못하죠. 저는 책을 읽고 글을 쓰고 토론하는 지적 활동을 좋아해요. 이런 건 인간밖에 못하잖아요. 독수리가 돼서 하늘을 훨훨 날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있지만, 밀렵꾼 총에 맞아 숨이 끊어지기도 전에 가죽이 벗겨질까 봐 두려운걸요. 인간으로 사는 것에 대한 좋고 싫음과는 별개로, 인간의 잔인함을 알기에 다른 동물로 살아갈 수는 없어요. 인간으로 사는 게 어쨌든 지금의 저에겐 최선이란 말이에요.
J : E님의 부채감은 거기서 비롯된 거예요. 내가 인간이라는 것은 끔찍하지만, 그럼에도 인간이 되는 걸 포기할 수는 없어서 생긴 죄책감이라는 거죠.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건 결국 저주란 말이에요. 그리고 다른 생명의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인간에게 지배력이 있다는 착각 때문이 아닌가요? 예를 들어 볼게요. 당신은 앞서 말한 자연에 대한 부채감을 어떻게 해소하고 있나요?
E : 플라스틱 덜 쓰고, 실내에서 절전하고, 텀블러 쓰고...
J : 당신의 그런 행동으로 지구의 수명을 컨트롤할 수 있나요?
E : 음... 어느 정도는 되지 않나요. 노화를 늦추는 정도.
J : 틀렸어요. 그건 인간의 믿음일 뿐이에요. 곰팡이는 곰팡이고, 인간은 인간이고, 지구는 지구란 말입니다. 그러니 다른 생명에 피해를 주지 않는게 최선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존재 자체로 자연에 피해가 되죠. 혹시 술 마시나요?
E : 잘은 못 마시지만 가끔 마셔요. 왜요?
J : 몸에 좋지 않은 걸 알면서도 인간은 과음을 하며 수명을 축내요. 지구는 원해서 스스로를 파괴하진 않지만, 인간은 스스로를 파괴하며 그 고통을 즐기죠. 자기 자신도 파괴하는 인간이, 자연이라고 파괴하지 못하겠어요? 그리고 E님, 내 생각은 그래요. E님이 태어난 데엔 아무런 이유도 없어요. 벽에 퍼진 곰팡이처럼 인간 번식활동의 일부로 태어났을 뿐이죠. 그리고 모든 인간은 태어난 이상 죽을 때까지 자연을 파괴하다 갈 거예요. 어쩔 수 없이.
지난달에 '2050 거주불능 지구'라는 책을 읽고 나는 불쾌했다. 책의 주제의식을 짧게 요약하면 인간이 기후재난을 완전히 막을 수 있다는 낙관론 제시 보다는, 막을 수 없더라도 일말의 노력을 해야 한다는 쪽이다. 그런데 나는 왜 이 책을 읽고 불쾌하였는가? 저자가 주장하는 기후재난을 막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이유가 인간의 생존을 위해서임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즘에 와서 화자 되는 환경 관련 이슈는 지구의 수명을 조금이라도 연장해 후손이 살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여 종족의 번식을 이어가기 위한 인간의 이기심에서 비롯되었다. 전 세계적으로 베스트셀러가 된 그 책을 만들고 배포하는 동안에도, 저자의 책과 관련한 강연을 인터넷으로 송출할 때도 탄소는 배출된다. 인간의 문명은 자연에 유해하다. 하지만 인간은 문명을 포기하거나 인간이 되는 것을 포기할 생각은 없다. 인간이 자연에 해가 되기에, 출산을 하지 않는 것이 플라스틱을 안 쓰는 것보다 근본적이고 적극적인 환경보호행위가 될 수 있다. 그런데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출산율을 줄이자는 이야기는 그 누구도 하지 않는다. 인간의 이익에 반하기 때문이다. 그저 환경이 망가지면 인간의 생존에 위협이 되니, '플라스틱 사용을 줄이자. 지구를 위해서 말이야.'라는 무책임한 말로 본연의 이기심을 얼버무린다. 자연은 우리의 실존에 책임을 묻는다. 지구의 수명이 정해져 있다는 사실은 오히려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이런 거다. 지구도 언젠가 나처럼 죽는다. 내겐 지구의 환부를 고쳐 줄 수 있는 기술도 능력도 정치력도 없다. 그 사실을 이해하고 덤덤해지는 것이 지금의 삶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지구에게 전하고 싶다. 그래 고생이 많다. 우리 같이 적당히 살다 가자. 너 아픈 거 아니까 되도록 살면서 피해 주지 않을게. 물론, 다른 인간들이 너에게 주는 피해는 나도 어쩔 수가 없어. 그래도 그들을 대신해서 미안해하지는 않을게. - 그냥 우리, 적당히 살다 때 되면 가자. 힘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