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플한 아메리카노와 그렇지 못한
갓 내린 에스프레소에 뜨거운 물을 쪼르륵 부어 내어 주는 아메리카노. 받자마자 호로록- 했다가 입술과 입천장을 화르륵- 데었던 기억에 후후 불어 조심스레 살짝 머금는다. 천천히 입 안에서 혀로 굴리며 향을 음미하다 꼴깍 삼킨다. 좀 식어 마시기 적당한 온도가 될 때까지 기다린 후 비로소 두 손으로 꼭 쥐어 먼저 차가운 손을 녹이고 다시 호로록- 한 모금 마실 때 고소하고 씁쓸한 향이 입 안을 통과하여 몸속 구석구석 따뜻한 기운을 전한다. 머리가 맑아진다.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런 건 아메리카노가 아니라면 느낄 수 없다. 나에게 우유나 설탕이 들어간 커피는 커피가 아니라 커피를 첨가한 다른 음료다. 나는 커피에 물 외에 다른 뭔가를 섞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이건 내 인생에도 해당된다. 나는 누군가 내 인생에 멋대로 섞이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모든 사람과 적당한 거리를 둔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데 좋다는 걸 살아가며 깨우쳤다. 나는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누군가 나에게 기댈 자리를 만들지도 않는다. 그러면 모든 사람과 잘 지낼 수 있다. 그래서 아메리카노를 좋아한다. 모든 빵 종류와 궁합이 좋지만 무엇과도 뒤섞이지 않으며 빵은 빵대로, 아메리카노는 아메리카노대로 따로 하지만 같이 최고의 맛을 내니까. 그리고 아메리카노의 또 하나의 매력은 다 마실때까지 질리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내가 누군가에게 당신은 아메리카노 같은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칭찬이다. 실은 내가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고.
대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그런 식이다. 나를 닮아서 좋아하고, 좋아해서 나와의 공통점을 찾아낸다. 만약 내가 당신은 나와 참 다르군요. 라고 말한다면 속마음은 당신 제발 그 입 좀 닫아줄래요. 일지도. 만약 내가 당신은 나와 공통점이 많아요. 라고 말한다면 나는 어떻게 해서든 당신과의 접점을 찾아내어 우리가 아메리카노와 크루아상 같은 궁합임을 증명하겠습니다. 일지도. 그렇게 해서라도 굳이 우리가 운명공동체라는 합리성을 설계해야 내가 당신에게 집중할 수 있다면 나는 기어이 그리한다. 우리 관계의 지속을 위하여. 실은 내가 그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명분을 만드는 것에 불과하지만.
그런 나라도 아메리카노를 마실 때는 한 가지 룰이 있다. 반드시 식기 전에 마신다는 것.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좋아하지만 따뜻한 아메리카노가 차가워지는 건 딱 질색이다. 그래서 나는 아주 뜨거운 상태에서 조금 식어서 아메리카노가 먹기 적당한 상태가 될 때까지 수시로 입술 가까이 대보며 온도를 체크하다가 마침내 내가 원하는 온도가 되면 그때부터 허겁지겁 마신다. 온기를 기분 좋게 음미할 새도 없다. 식을까 봐 식기 전에 빠르게 꿀꺽꿀꺽- 허무할 정도로 금세 마신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 소중한 걸 손에 쥐면 사라질까 봐 조급해져 사라질 때까지 욕심을 부리는 사람. 그러면서도 투명하게 찰랑거리며 고소한 향을 내던 잔이 미처 갈리지 않은 원두 가루를 처참하게 드러내며 허연 바닥을 보이는 게 견딜 수 없어 딱 한 모금 정도는 남겨두는 사람. 한 모금을 남긴 채 카페에 앉아있다 자리에 일어날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잔을 들어 그것을 삼킨 후 흉측하게 빈 잔을 얼른 치워버리는 사람. 장욱진 작가는 생전 나는 심플하다는 말을 남겼다. 나는 그가 부럽다. 나도 나 자신에 대해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심플하다. 선생님은 자신의 수많은 작품 앞에서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나는 달리 이룬 것이 없어 내 뒤에 둘 것이 없다. 그래도 나는 이렇게 말을 하고 싶다.
여러분. 저는 심플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아메리카노만 마시거든요. 한 달 전에도, 일주일 전에도, 어제도, 오늘도, 저는 카페에서 아메리카노만 마셨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