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자꾸 산으로 가요
지난주에 브런치 웹사이트에서 '브런치 작가와 함께 다시 쓰는 안데르센 세계 명작'이라는 제목의 글을 봤다. 보자마자 생각했다. 어, 이거 재밌겠는데. 자세히 읽어보니 분량은 A4용지 1~2장 정도를 채우면 된다고. 분량이 짧으니 응모 마감일인 15일까지는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다. 나는 머릿속으로 소설을 구상하고, 틈틈이 한줄씩 한 문단씩 쭉쭉 써내려갔다. 그런데 이게 참... 쉽지가 않다. 이제 마감은 4일이 남았고, 난 아직도 이야기의 기승전결을 갖추지 못했다. 솔직히 응모나 할 수 있을는지 의문이다. 응모 여부가 불투명해진 현재, 응모하려 했던 글들의 흔적이나마 남기고 싶어 이렇게 적는다. 그러니까 이건, 미궁으로 빠진 몇 가지 내 단편소설 쓰기 시도에 관한 글이다.
1. 제목 : 분자 선풍기와 소녀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성냥팔이 소녀의 상황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 이 소설의 배경은 디스토피아 즉, 멸망해가는 도시. 소녀는 갑자기 건물이 무너지는 상황에서 황급히 지하철 통로로 대피했다. 그런데 무너진 건물 때문에 출구가 막혀 바깥으로 나갈 수가 없게 되었다. 소녀는 우연히 주운 랜턴을 들고, 낮과 밤도 구분되지 않는 깜깜한 지하철 터널길을 따라 출구를 찾아 걸어간다. 시간이 지날수록 손전등의 빛은 점점 희미해져만 가고, 배도 고프고 목도 말랐다. 하지만 우리의 소녀는 가까스로 꼬박 하루를 걸어 마침내 목적지인 동대문 역사문화공원역에 도착하고는 무사히 출구로 빠져나왔다. 그런데 바깥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사람이 하나도 없고, 건물들이 불에 활활 타오르고 있다. 사실 소녀는 상황이 그렇게 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삼촌이 행방불명 되기 전에 소녀에게 해준 이야기 때문이었다. 삼촌은 빙하가 녹으면서 빙하 안에 잠자고 있던 바이러스와 유해물질이 유출될 것이라 했다. 그중 가장 심각한 건 바로 자연발화물질. 자연발화물질이 바다와 강을 타고 토양으로 방출되어 온 세상을 활활 태워버릴 것이라고, 삼촌은 말했다. 삼촌의 말이 사실이었음을 새삼 깨달으며 소녀는 비장한 얼굴로 삼촌이 준 분자 선풍기를 가방 안에서 꺼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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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발화 물질을 막을 수 있는 선풍기야. 혹시 모르니 챙겨두고... 절대 3분 이상 켜 두지 마. 발화 분자뿐 아니라 바람에 닿는 모든 분자를 분해해.
삼촌이 만든 분자 선풍기에는 특수 냉각장치가 있어, 순식간에 자연발화 물질의 분자를 분해하여 눈 앞의 물체가 불에 타는 것을 일시적으로 막을 수 있었다. 삼촌은 이제 아이슬란드에 갈 것이라 했다. 아이슬란드에는 화학 에너지를 연구하는 삼촌의 동료들이 있었다. 그곳에서 동료들과 함께 거대한 분자 선풍기를 만들어 세상을 구할 것이라 했다. 하지만 그 뒤로 삼촌의 행적은 묘연했다. 아마 삼촌은, 아이슬란드에 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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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쓰다 보니 고민이 생겼다. 안데르센 원작 성냥팔이 소녀에서 소녀가 파는 '성냥'과 분자 선풍기와 소녀에서 소녀가 손에 쥔 '분자 선풍기'의 속성이 너무 달랐던 것. 성냥팔이 소녀는 본인이 피운 성냥불 속에서 환영을 보며 얼어 죽는다. 그런데 소설 속 소녀는 분자 선풍기로 세상을 구하려고 한다. 자연발화물질을 이길 수 없음을 깨달은 소녀가 분자 선풍기를 본인의 머리맡에 켜 둠으로써 자살을 택하고 분해되는 결말을 생각했는데, 비장하게 분자 선풍기를 가방안에서 꺼내들던 소녀가 그토록 좌절하려면 보다 구체적인 서사가 필요할 것 같았다. 나의 구상 속에선 이 소설은 마지막에 소녀의 영혼이 아이슬란드에 도착하고, 아이슬란드에서 죽은 삼촌을 만나서 오로라가 커튼처럼 펼쳐진 밤하늘을 날아다니며 끝난다. 그 장면의 묘사를 아름답게 풀어내고 싶어 시작했던 소설이지만, 중반부를 어떻게 전개해야 할지 답이 나오지 않아 중단했다.
2. 제목 : 선풍기 파는 소녀
전자의 SF적 요소를 배제하고 현실세계를 배경으로 했다. 소녀의 아버지는 몸이 아프고, 소녀는 그런 아버지의 병원비와 생활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다. 물론 집에는 빚도 많다. (어디서 많이 보고 들은 클리셰를 전부 집어넣었다.) 소녀는 회사가 망하기 전 아버지가 팔던 선풍기를 지하철에서 팔며 생계를 이어간다.
여기까지는 안데르센 원작 성냥팔이 소녀의 세계관과 맥락이 유사해서, 쓰면서 마음이 꽤나 편안했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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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로 인해 쓰러질 듯 어지러웠던 그날, 1호선 인천행 지하철에 탑승하니 어떤 남자가 쿨수건을 팔고 있었다. "한 장에 2천 원, 두장에 3천 원. 물에 적셔서 목에 탁 걸치면 아주 시원해." 그 멘트를 듣는 순간 불현듯 생각났다. 그래. 선풍기를 팔자! 내가 가진 거라곤 아버지가 주신 선풍기 밖에 없는걸. 한 박스당 천 개의 재고가 들어있는 선풍기 박스를 나는 총 다섯 박스 갖고 있다. 그럼 내가 갖고 있는 선풍기는 오천 개. 개당 2천 원에 판다면 다 팔면 무려... 천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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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쓰고 나니 뭔가 이상했다. 소설 속 소녀는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당찬 캐릭터였다. 유연한 생활 감각과 탁월한 계산 능력을 가진 이 똑똑한 소녀는 안데르센 원작의 굶주리고 학대당하는 가엾은 소녀와는 너무 달랐다. 이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몰입감이 확 사라지고 말았다. 원래 이 소설의 마지막은 소녀가 지하철에서 선풍기를 팔다가 쫓겨나고, 38도의 땡볕 무더위 아래 바깥에서 선풍기를 팔다 열사병으로 쓰러져 죽는 결말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야무진 소녀라면, 열사병 증상이 나타났을 때 몸의 열을 식히기 위해 근처 은행에라도 잠시 들어갔을 거란 말이다. 그런 이유로 2번 이야기도 결국 흐지부지.
3. 제목 : 분자 선풍기를 파는 소녀
그렇다. 1번과 2번을 합친 끔찍한 혼종이다. 1번 이야기처럼, 삼촌이 지구를 구하기 위해 분자 선풍기를 만들었다. 그런데 꽤 많이 만들었다. 소녀는 삼촌이 행방불명된 후, 식량을 구하려고 자신이 가진 것 중 유일하게 값진 물건인 분자 선풍기를 들고 거리로 나선다. 근데 문제는, 이걸 도대체 누가 사겠냐는 말이다. 건물이 불타고 사람들이 픽픽 쓰러져 죽는 멸망한 도시에서 선풍기 얼마냐고 묻고, 통조림 다섯 캔과 라면 한 박스와 교환하겠다고 친절하게 답변하고, 감사합니다. 하고 쿨거래. 무슨 당근 마켓도 아니고... 그보다는, 이런 디스토피아 세계관이라면 악당이 나타나서 소녀의 선풍기를 빼앗는 전개가 훨씬 자연스러울 텐데. 하지만 그렇게 되면 스케일도 너무 커지고 이야기가 두장으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었다. 결말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고, 무엇보다도 이건 쓰는 내내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이라는 영화가 생각났다. 망작이 이렇게 탄생하는구나 싶어서, 3번도 쓰다 말았다.
이런 이유로, 나는 아직 '다시 쓰는 안데르센 세계 명작'에 응모할 단편 소설을 단 한 줄도 쓰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