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하지만 자유롭고, 외롭지만 풍요롭다
눈을 떴다. 더웠다. 그리고 습했다. 쏟아질 듯 말 듯 애태우는 장마가 미웠다. 그냥 시원하게 퍼붓고 말지. 선풍기를 켜놓고 누워있어도 몸의 열이 가시지 않았다. 원고 작업을 해야 하는데. 오늘까지 초안 하나는 끝내 둬야 이달 남은 작업 할 여유가 좀 생기니까. 전날 새벽까지 해둔 게 있어 몇 시간만 더 보면 될 것 같았다.
일어났다. 바닥에 깔아 둔 방석 위에 앉았다. 좌탁 위에 팔을 얹었다. 팔이 탁상에 달라붙었다. 맥북을 열었다. 한 시간 정도 작업을 하다 보니 뜨거워진다. 선풍기를 맥북 쪽으로 쐬어줬다. 얼마 전에 산 내 소중한 맥북 열 받아서 수명 줄어들면 안 되니까. 그러다 팔에서 나는 땀이 찝찝해 선풍기를 다시 내 쪽으로. 머리카락이 휘날리며 얼굴에 끈적끈적 달라붙었다. 불쾌했다. 아. 일단 씻고 오자.
씻었다. 머리를 말렸다. 찬바람으로 말리니 잘 안 말라 더운 바람 강풍으로 말린다. 더웠다. 뜨거웠다. 얼굴이 익는 것 같다. 코에서 땀이 났다. 팔을 뻗어 내 쪽으로 가져오려던 선풍기가 엎어졌다. 와장창. 젠장. 상단 뚜껑이 분리되며 나가떨어졌다. 망가진 게 아니니까 끼워서 쓰면 되지만 귀찮다. 머리를 마저 말린 후 결심했다.
나가자.
알고 지내는 프리랜서 작가님이 애용하는 공유 오피스. 여긴 한 마디로 사회인 도서관이다. 가입 후 3일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세시부터 네시 사이엔 원한다면 위스키 한 샷을 서비스받는다. 난 차를 갖고 갔기 때문에 술은 안 받았다. 대신 카페테리아로 이동해 종이컵에 얼음을 가득 뽑아 담고, 그 위에 커피를 내렸다.
자리를 잡았다. 구석자리 곳곳엔 사람들이 이미 앉아있어 통로 쪽에 앉는다. 은은한 백색소음. 조용히 노트북 너머 본인의 세계에 집중하는 사람들. 이름 모를 커다란 식물들이 에어컨 바람에 산들산들거린다. 공기가 보송보송하다. 쾌적하다. 한 달에 3만 3천 원의 기본요금, 시간당 3천3백 원이라는 3 집착적 할증에 대한 나름의 납득이 있었다.
퇴사 7일 차, 프리랜서 7일 차, 내 이름 석자로만 살아간 지 이제 딱 7일 차 되던 날 느낀 색다른 자본의 맛. 내 의지로 이동해 어딘가에서 일한다는 감각이 좋았다. 일주일에 하루나 이틀 정도는 이 곳으로 출근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1일 이용권을 팔면 좋겠는데, 물어보니 그런 건 없고 한달 결제만 가능하다고. 한 달 이용권을 결제해서 다니기엔 이 곳은 집에서 멀다. 게다가 한번 오면 일곱 시간에서 여덟 시간은 작업을 할 거라서 주차비만 만원 이상이 든다. 생존을 위한 교류와 활동의 베이스에는 내가 반백수라는 인식이 있어야겠지. 돈을 아껴야 한단 소리다. 단골이용을 포기한 후 이날은 목표로 했던 초안을 마무리하고, 메일을 한 통 발송하고, 내게 집무실을 소개해준 지인 작가님을 만나 일 얘기 사는 얘기 재미난 얘기들을 나눴다. 생각이 깊은 사람과의 대화는 농도가 짙다. 우리는 단시간 동안 여러 소재를 산만하게 가져와 촘촘하게 떠들다 헤어졌다.
다음날이다. 아홉 시쯤 일어나 씻고 열 시쯤 나와 집 근처 카페로 출근했다. 가까운 거리라 걸어갔다. 집무실보다 소란스럽고, 조명도 좀 어둡다. 그렇지만 집에서 가깝고, 주차비 걱정도 없고, 커피 한잔 값만 지불하면 되니 가성비도 썩 괜찮다.
몇 시간 쯤 지났을까. 배가 고파서 그만 정리하고 나갈까 하다 유리창 너머로 재미있는 걸 목격한다. 고양이 두 마리가 3분 간격으로 상가 앞에 모였다. 얼룩이가 먼저 왔고, 노랑이가 늦었다. 일찍 온 얼룩이가 심통난 표정으로 늦게 온 노랑이를 향해 걸어오는 장면이 귀엽다. 스마트폰 없이도 같은 시간 한 자리에 모이는 이 친구들, 신기하다.
사무실에서 일할 때 내 눈앞에 보이는 것은 네모난 모니터와 맞은편 앞자리의 앉은키가 큰 남직원 정수리뿐이었다. 그렇게 지내다가 불과 열흘도 안되어 이제는 창밖으로 고양이 두 마리 노니는 걸 구경하며 일하자니 자유롭잖아. 몽글몽글 기분이 좋았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불안했다. 나 이러고 있어도 되는걸까 정말.
7년 남짓 회사생활을 했다. 7년간 재취업까지의 공백기는 합해봐야 서너 달. 당시의 공백기는 재취업을 위한 준비기간이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당분간 취직을 할 생각이 없으니 말이다. 어쩐지 묘연하게 서글프고, 세상과 동떨어진 느낌이 들다가도, 한편으로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 더욱 농도 짙은 대화를 하며 본연의 나를 알아가는 듯한 일상이다.
그런 생각도 했다. 프리랜서로 산다는 건 좀 더 부지런해져야 한다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닐까. 나는 자신의 영역에 대한 전문성을 업그레이드하며 나날이 다방면에 진출하고 새로운 일들을 벌이는 지인들을 여럿 알고 지낸다. 회사에 다닐 땐 그저 남의 일이라 생각해 부럽기만 했는데, 막상 내가 그렇게 살아가고자 진입로 입구에 서있자니 그들이 얼마나 숱한 내적 갈등을 극복하면서 성실하고 빼곡하게 자신의 삶을 채워왔는지 알 것 같다.
조만간 해야 할 일들이 있다. 먼저, 대박이랑 대박이 할아버지를 만나야 한다. 몇 달 전 삼청동에 전시를 보러 갔다가 길에서 우연히 처음 본 할아버지와 그 할아버지랑 산책나온 강아지 대박이를 만났고, 동의하에 그 둘을 내 필름 카메라로 촬영했다. 인화까지 마쳐두고 할아버지께 꼭 사진을 직접 전해드리겠다 약속하고는, 바쁘다는 핑계로 여태 못 찾아갔다. 할아버지에게 전화가 왔었는데도 못가서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건강하게 지내고 계셔야 할텐데. 이제는 꼭 만나서 사진을 드리고, 대박이 사진을 몇 장 더 찍어오고 싶다. 그리고 옆에 앉아서 대박이와 할아버지의 만남에 대한 짧은 인터뷰를 하고 싶다. 대박이는 잘 지내고 있을까. 보고 싶다. 두 번째로는 과거에 매거진 일을 하며 만난, 파주의 모 국악 스튜디오 대표님을 뵈러 가야 한다. 나와 대화가 잘 통해서 언젠가 함께 인터뷰와 관련한 프로젝트를 기획해보기로 하고는, 만날 약속을 잡다가 이 또한 내가 바쁘다는 핑계로 미룬 지 일 년이 넘었다.
회사를 다니지 않고도 밥을 굶지 않고 살 수 있을까. 물론이지.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많이 있으니까. 내 주변에도 많은걸. 하지만 내가 그럴 수 있을까. 이 질문에는 선뜻 '물론이지'라고 당당하게 대답하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내가 회사를 다니지 않고 살아보자 마음 먹었던 것은 회사를 다니건 다니지 않건, 내 인생의 해피엔딩을 보장할만한 근사한 솔루션이 어디에도 없다는 걸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아무튼 당분간은 그저 지난 한 주처럼 당장의 주어진 일을 하고, 하고 싶은 일도 하고,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찾아가 만나는 것으로 하루 하루에 충실하며 살아보기로 한다. 그러다 생기는 이야기로 나는 더욱 내가 될 테고, 그게 쌓이면 내 삶이 될 테지. 내 이야기가 나를 어디로 데려다 줄지 흥미진진하다.
내일도 카페로 출근해야겠다. 내일은 동네 카페 말고, 조용한 외곽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