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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yum Mar 28. 2022

나에게 이름을 지어줬다

개명 후에 알게 된 것들

이름을 바꿨다. 어떤 절의 어떤 스님이 지어주셨다는 이름, 매일 듣고 매일 쓰고 그래서 지겨웠던 이름, 너무 흔해서 혹은 그저 좀 더 예쁘고 더 부르기 편한 이름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그 이름으로 산지 꼬박 서른여섯 해를 넘기고 나서 나는 기어이 그 이름을 과거의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이름을 바꿨다? 글쎄. 내가 내 이름을 짓는 건 처음이다. 그러니 내가 나에게 이름을 지어줬다는 말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지금은 프리랜서 작가로 일을 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글을 쓰는 걸 업으로 삼을 거라며 나를 소개했고, 나의 업에 걸맞은 이름을 쓰고 싶다고 했다. 또, 지금까지 살아온 내 인생에서 특히 어려웠던 무엇을 이야기하고, 그 무엇이 해결될 수 있는 이름이면 좋겠다고 했다. 이름을 지어준 작명가인 그는 언행이 점잖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런대로 목소리와 이름 만으로 나의 심성을 미약하게나마 가늠할 줄 아는 센스는 있었다. 사기꾼 같기도 하고 점쟁이 같기도 한 그 작명가 할아버지로부터 나는 새 이름을 지었다. 그리고 나는 그의 기분 나쁜 부분이야 어쨌건(그는 어차피 이름을 짓는 카피라이터일 뿐이라 생각했기에) 그가 지은 이름으로 내 남은 인생에 힘과 운을 싣기로 하고 개명 신청서를 작성하였다.


이름을 법적으로 바꾸는 데 3개월이 걸렸다. 너무 오래 걸리길래, 혹시 허가를 받지 못하는 건 아닐까 했다. 만약 허가를 받지 못한다면 그냥 바꾸기 전 이름으로 살고, 새로 받은 이름을 예명으로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바꾸기 전엔 그렇게도 이름을 바꾸고 싶었는데, 막상 법원에 개명 신청서를 제출하고 나니 이름이야 이래도 그만이고, 저래도 그만이 아닌가 싶었다. 내가 키우는 거북이 이름이 호박이면 어떻고 동글이면 어때. 거북이는 거북이일 뿐인데. 마찬가지로, 나는 나일뿐인데 말이다. 그리고 나는 새로 지은 이름의 어떤 부분이 약간 못마땅하다. 은겸. 원하던 대로 너무 튀지 않으면서도 어감도 좋다. 말씀 은과 겸할 겸으로 한문 풀이도 좋고 내가 하는 일과도 매끄럽게 잘 어울린다. 하지만 전에 쓰던 이름보다 어쩌면 더 부르기 불편한 이름 같기도 하다. 결국 세상엔 완벽한 이름은 없다. 난 그걸 이름을 바꾸고 나서야 알았다.


그래도 이름을 바꾼 것에 대한 후회는 없다. 전에 쓰던 내 이름이 나는 마치 떠나간 사람 같다. 나는 과거의 사랑을 조용히 추억하고 애도한다. 그렇지만 추억은 추억일 뿐이다. 과거를 되돌린다면 내가 과거와 작별해야 했던 이유가 생각날 것이었다. 그랬다. 개명이란 곧 나와의 이별이었다. 새로 지은 이름으로 산다는 건 다른 이름으로 살던 과거의 나를 조금 더 냉정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그때 일은 그때 일로 놓아두고 새롭게 살아보자는 결심으로 묵묵히 나아가는 성찰의 과정이다. 몰랐다. 사람 사이뿐 아니라, 나 자신과도 이별할 수 있다는 것을. 그렇게 생각하니 참 이름을 잘 바꾼 것 같다. 필요한 이별이었다. 슬프지만.


이제 나는 새로운 이름으로 나를 불러준다. 내가 이름을 불러주기 전, 당신은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유명한 시다. 그래, 그 시인의 말처럼 누군가 새로운 이름으로 나를 불러주면 나는 매번 내가 나라는 것이 새삼 새로울 테지. 하지만 그 누군가가 개명을 해서 마냥 기쁘고 행복하냐 묻는다면 전혀 그렇지 않다고 답하리라. 이름을 바꾼다고 내 인생이 갑자기 뒤바뀌어 내가 예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될 일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내가 나를 어떻게 보느냐, 뭐라고 정의하느냐, 그것은 바뀐 이름으로 인하여 달라질 수도 있겠다. 나는 나를 많이 사랑해주고 싶다. 내 인생에서 가장 중차대한 숙제란 바로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란 말이다. 처음부터 자기애가 충만한 채로 나고 자란 이들과는 다르게, 모자라고 아쉬울 만큼만 나에게 애정을 주던 내가 앞으로는 더 나를 사랑해주고자 하는 것도 새 이름을 지은 것에 대한 변명이다. 그렇게 깊이있게, 계속, 많이 사랑해주고 칭찬해주고 싶어서 더듬더듬 어색하게 나는 나를 불러본다. 과거의 나에게는 그동안 잘 살아줘서 고맙다고, 수고 많았다고. 새로 지은 이름의 나에게는 앞으로 잘 살아달라고, 사랑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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