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H의 팔순의 꿈

우린 아무 일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by Kyum


키가 꽤 크다는 이유로 주변인들로부터 키가 몇이냐는 질문을 자주 받을 테니, 나만은 물어보지 않기로 했다. 물론 몸무게도 물어보지 않았다. 다만 속으로는 이 친구는 키도 크고 뼈도 굵은 듯 하니 몸무게가 상당히 나가겠군. 191cm에 90kg쯤 되려나?라고 짐작했을 뿐이다. 남자의 몸무게 구성 원리를 잘 몰라 정말 어림짐작이었을 뿐이었지만.


키가 크고 어깨도 넓고 머리도 크고 광대도 크고 팔과 다리는 전봇대처럼 쭉쭉 기다란 H. H는 까만 피부와 탄탄한 팔근육 때문에 운동선수처럼 보인다. 얼굴을 보자면 커다란 눈코입이 꽉꽉 들어찬 이목구비와 억세게 자란 머리카락은 꼭 힘센 황소가 마술을 부려 사람으로 둔갑을 한 것 같다. 이 또한 H에게는 지겨운 질문이었겠지만, 혹시 운동하시는 분이냐고 물었다. 아니요. 저 수영이 취미예요. 사회인 야구 했었고요. 그 또한 취미로.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저 정도 몸을 유지하려면 상당히 많은 음식을 먹겠구나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지난 2월 두 번째로 H를 본 날, 점심을 잔뜩 먹고 카페에 가서 과일 음료와 함께 디저트로 초코가 곁들여진 빵 두 개를 나눠 먹은 후, 둘 다 술을 마시지 않으니 이야기나 좀 더 나눌 겸 맥도널드에 갔을 때 알았다. 이 녀석에게 아까 먹은 점심식사는 애피타이저 정도였다는 걸. H는 그날 햄버거 세트메뉴에 햄버거 하나를 더 얹어 주문한 후 내 눈앞에서 게눈 감추듯 흡수해버렸다. 고작 내가 맥플러리 하나를 다 먹는 15분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말이다. 햄버거를 먹을 때의 H는 바닥난 연료통에 휘발유를 충전 중인 대형 SUV 같았다. 연료가 없으면 꿈쩍도 못하지만, 연료만 채우면 우렁찬 엔진소리를 내며 오프로드에서 200km 질주도 끄떡없는 힘센 SUV. 비록 오프로드용은 아니지만, H는 본인과 잘 어울리는 SUV를 타고 다닌다. 그래. 저 정도 몸이라면 SUV를 타야겠지. 준중형 세단을 탄 H는 흡사 비좁은 신발장에 구겨 넣은 300 사이즈 농구화 같을 테니.


- 너 꿈이 뭐야?


H를 두 번째로 만난 건 내가 통영으로 여행 온 지 이틀째 되던 날이었다. 나보다 두 살 어린 H에게 난 반말을 하고, H는 여전히 내게 말을 높이고 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서 H가 편한 대로 말하게 내버려 두고 있다. 그날 우리는 H의 차를 타고 통영 산양 일주로 어딘가에 있는 카페를 향하고 있었으며, 난 해가 지면서 하늘과 바다가 오렌지색으로 물드는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H는 내 질문에 잠시 뜸을 들이더니 대답했다.


- 80세에 수영대회 나가는 게 꿈이에요. 비행기 타고 전 세계 수영대회 나가서 메달 휩쓸거에요.

- 멋진 꿈이네. 근데 왜 하필 팔순에? 은퇴 후라면 60대가 될 수도 있고, 잘만 준비한다면 50대에도 가능할 텐데.

- 누나. 그건 팔순에 해야 의미가 있는 거라고요.


그러면서 2019년 광주에서 열린 세계수영 선수권대회에서 홀로 게임에 참가한 90대 할아버지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날 H도 대회에 참가했었는데, 승패를 떠나 모든 게임에 최선을 다하며 완영 하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경기 내내 줄곧 지켜봤으며, 대회에 함께 참가한 동호회 사람들과 스텝들 모두 할아버지로부터 크게 감동을 받았다는 것. 그래. 분명히 그 나이에 그런 대회에 나가서 완영을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테니까.


- 그러니까 또 다른 꿈은 80세까지 잘 살아남는 거예요.

- 멋지다. 너 사는 거 행복해?

- 글쎄요. 마냥 좋다고만은 못하겠지만, 어쨌든 살아있다는 건 좋은 일 아닌가요.


작년에 통영을 여행하다 게스트하우스에서 H를 만난 날, H는 J와 둘이 통영을 여행하고 있었다. 게스트하우스 라운지에서는 떨어져 앉아서 대화를 나눈 기억이 없고, 2차를 하기 위해 갔던 해물뚝배기 집에서 나는 H와 통성명을 했다. 그날 H는 내 왼쪽 옆자리에 앉았는데, 옆에 앉으니 H의 몸이 커서 자리가 부족해 난 내 의자를 좀 우측으로 붙여 앉았다. 술을 거의 마시지 못하는 데다 사람 많은 자리에서 급격히 피로해지는 터라, 난 보통 사람 많은 술자리에 가면 두어 명을 지긋이 관찰하며 혼자만의 세계에 빠지는 버릇이 있다. 그날 내 관찰 대상은 H였다. H는 왼쪽 네 번째 손가락에 굵은 금반지를 끼운 큼지막한 손에 콩알만 한 소주잔을 붙들고 잔이 채워지기가 무섭게 턱턱 비워대고 있었다. 어찌나 시원하게 삼켜대는지,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소주를 마시는 사람 같았다. 수영이 취미라는 H의 말에 나는 수영을 잘하는 것과 소주를 잘 마시는 것 사이에 어떤 관련성이 있는 게 아닌가 했다. 소주는 물로 만들고, 수영도 물에서 하는 거니까.라는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그날 게스트하우스에서 일행들과 함께 있던 자리에서는 별 이야기를 안 했는데, H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은 건 지난 2월 통영에서 같이 점심을 먹고 카페를 가고 맥도널드에도 간 날이었다.


H는 여섯 살 때 강물에 빠져 죽을뻔한 경험 때문에 물 공포증이 있었다. 그래서 스무 살이 넘어서까지 수영을 할 수 없었는데, 대학교 때 친구들과 해변에 놀러 가는 일이 많아지면서 매번 물에 안 들어간다는 이유로 혼자 짐꾼과 심부름꾼을 도맡아 하는 게 억울해져 수영을 배우기로 결심했다. 사람에게는 각자 타고난 재능이라는 게 있는 법이던가. H의 뛰어난 수영실력은 선생님도 놀라게 할 정도였다. 금세 영법을 마스터한 후 수영동호회에 가입한 H는 동호회에서 마음이 잘 맞는 친한 형인 J를 만났고, 그곳에서 알게 된 어떤 여자와 연애도 했다. 동호회 사람들과 함께 전국 수영대회에 출전할 때는 종종 1등을 도맡아 하며 메달을 휩쓸었다. H에게 수영은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행위이며, 타인과 교류하는 매개이자 청춘의 전부였다.


- 그래도 나는 수영강사는 안 하기로 했어요.

- 수영강사 하고 싶을 때도 있었나 보네?

- 있었죠. 그래도 안 하기로 결심했어요.

- 왜?

- 수영이 일이 되면...


자기가 갖고 있던 유일한 취미를 빼앗기는 거라고, H가 말했다. 대학에서 제어 관측을 전공한 H는 졸업 후 곧바로 전공을 살려 취직을 했다. 경직된 조직문화, 지루한 업무 루틴, 고리타분한 상사까지 따분하기 이를 데 없는 직장생활이었지만 주말에 나갈 수영대회를 생각하면 버틸 힘이 생겼다. 그렇게 8년을 다녔다.


- 나는 나이 먹는 게 무서워. 팔순의 내 모습은 상상하기도 싫은데. 넌 안 그래?

- 싫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받아들여야죠.

- 팔순까지 아무 일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 아무 일도 없진 않겠지만, 무슨 일이 있다 해도 순리대로 살아야죠. 하루하루, 즐겁게.


지난 9월 중순, J의 장례식장에서 H를 세 번째로 만났다. 나에게 J의 사고 소식을 알려준 사람도 H였다. 우리가 두 번째로 봤을 때만 하더라도 어딘가에 J가 있던 세상(J는 그때 다른 지역을 여행하고 있었다)이 7개월 만에 어디에도 J가 없는 세상이 되었다. 장례식장에 갔다가 나를 역까지 데려다주는 차 안에서 H는 J에 대해 이야기하며 눈물을 흘렸다. 아아. 아무 일 없이 살아가는 건 역시나 어려운 일이다. 당장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우리는 어떤 예측도 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만약 운 좋게(혹은 얼떨결에) 아무 일 없이 살아가다 보면 우리는 팔순이 될테고, H는 새하얀 머리에 굽은 어깨, 그럼에도 변함없이 장대한 기골로 수영대회에 참가해 메달을 노리는 꼿꼿한 노인이 되어 있겠지. 그때까지 나는 살아있을까. 살아있다면 어디쯤에 있을까. 순리대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무엇을 얻게 되고, 무엇을 잃게 될까. 우리는 아무 일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만약 그렇대도, 아무 일이 없다고 아무렇지도 않은 인생인걸까. 나는 어떤 대답도 찾을 수가 없다.


스크린샷 2021-10-01 오후 12.58.34.png 2021.2 산양일주로에 있는 한 카페에서 H가 찍어준 내 뒷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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