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사 가는 택시 안에서

낯선 사람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by Kyum


올해 두 번, 작년에는 네 번 통영에 다녀왔다. 나는 그동안 통영에 수차례 방문했다. 알고 지내는 지인 중 하나는 고향이 통영인데, 자기보다 통영에 자주 가는 사람은 니가 처음이라고 했다. 통영은 내 고향이 아니며, 나는 그곳의 현지인으로 살아본 적도 없거니와, 현지에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일을 하기 위해 갔던 건 더더욱 아니다. 내가 통영에 간 건 그저 여행이었다. 자주 가다 보니 이제는 좋아하는 음식점과 단골 숙소, 즐겨 찾는 카페와 늘 방문하는 나만의 아지트가 생겨서 더 편하게 찾게된 단골 여행지.


통영에 가는 시기를 특별히 정해두지는 않았다. 즉흥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 으레 그러하듯 어느 날 문득, 가슴이 몹시 답답해지고 답답함의 요인이 지루한 일상에 있음을 알아차렸을 때. 또는 평소에 아늑하던 집이 갑자기 어떤 이유로든 감옥처럼 느껴질 때면 나는 아, 안 되겠다. 고 웃으며 당장 이번주 주말에 통영으로 가는 고속버스 티켓을 주저 없이 구매하곤 했던 것이다.


지명조차 생소했던 통영이라는 곳을 나에게 알게 해준 건 예전에 알고 지내던 한 남자애였다. 책과 음악을 좋아하며 섬세한 사람같던 그 애가 2011년 겨울에 이런 이야기를 했다. '어딘가로 떠나고 싶을 때, 배낭 하나 들쳐 매고 무작정 고속버스터미널에 갔어. 그리고 내 눈에 가장 먼저 보이는 버스를 탔지. 어디 가는 버스 인지도 모르면서 일단 탔거든. 근데 그게 통영 가는 버스였던 거야, 매번. 그렇게 해서 다섯 번을 통영에 갔어. 근데 갈 때마다 좋았어.' 나는 그 섬세한 남자애가 다섯 번이나 간 통영이 어떤 곳인지 궁금했고, 성인이 된 후 국내와 해외를 통틀어 여행 경험이 다섯 번도 채 안 되는 나와는 다르게 어학연수는 물론 프랑스며 뉴욕이며 수많은 해외여행을 경험한 그 애가 부럽고 좀 특별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나는 그 애가 사랑했던 런던과 프랑스까지는 당장 못 가더라도 통영은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꼭 다녀온 후, 언젠가 그 애와 통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1년이 지나 2012년 겨울이 되었다. 나는 당시 음악을 하고 있었고 라이브 클럽을 전전하며 오디션을 보거나 공연을 하러 다녔다. 그렇게 공연을 하다 음악 하는 지인들 몇 명을 알게 되었고, 그들 중 하나가 나에게 어떤 중년의 남자 가수 한 분을 소개해줬다. 그 중년 가수는 미사리와 행사 무대에서 7080 포크송을 부르며 생계를 유지하는 분이었는데, 당시 통영의 한 복지관의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작은 콘서트에서 '유리창엔 비'와 '시인의 마을'노래를 함께 듀엣으로 부르며 기타도 쳐줄 수 있는 여자 가수를 찾고 있다고 했다. 지인은 이야기를 듣자마자 곧장 내가 생각났다고 했다.


나는 공연 제안이 온 것에 기뻤고, 목적지가 통영이라는 것도 반가워 페이가 얼마인지는 물어보지도 않고 흔쾌히 공연을 하겠다고 답했다. 중년 가수와의 듀엣이라는 새로운 경험에 대한 호기심도 얼마간은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고속버스를 타고 혼자 통영에 갔고, 거기서 지인이 소개해준 중년 가수를 만나 한 시간 정도 합주를 하고는 복지관으로 이동해 그날의 작은 공연을 무사히 마쳤다. 공연을 본 공무원들은 노래가 너무 좋았다며 우리의 무대를 칭찬했고, 공연이 끝나고 우리를 횟집으로 데려가 비싼 회도 사주셨지만 나는 회를 몇 점 안 먹고 먼저 일어났다. 가게 맞은편 식당에서 내 친구들이 저녁식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은 공연 가기 전날 내가 친구들에게, 나 내일 통영 가는데 같이 갈래?라고 단톡방에 물어봤었고, 때마침 방학이라 한가했던 대학생 친구들이 '좋지!' 하며 세 명이나 오는 바람에 넷이 함께 즉흥여행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 넷은 그날 통영 시내에 있는 작은 술집에서 맥주를 마시고, 택시를 타고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해 밤 12시가 되기 전에 잠이 들었다. 다음날은 오전 7시에 일어나 조식을 먹고 나와, 일행 중 한 명이 짠 코스대로 유람선 터미널로 이동해 장사도행 배편에 탑승했다. 처음 가본 장사도는 빨갛고 노란 꽃들이 새활짝 피어있어 겨울에도 이렇게 예쁜 꽃이 피어날 수 있냐며 신기해했는데, 자세히 보니 대부분의 꽃이 가짜였다. 가짜 꽃에 실망감이 적지 않았지만 그래도 화사한 꽃을 배경으로 하니 사진만은 예쁘게 잘 나와서 우리는 거기서 사진을 잔뜩 찍었다. 그러고는 배를 타고 다시 유람선 터미널로 돌아가 근처 중국집으로 가서 굴이 들어있는 미역국밥을 먹었다. 굴 미역국밥에는 굴이 단 세 개뿐이었지만, 굴 크기가 주먹만하고 아주 싱싱했으며 국물 맛도 깔끔해서 나는 음식을 전혀 남기지 않고 싹 먹어치웠다. 알고 보니 그곳은 버스를 대절해서 멀리서도 오는 유명 맛집이었고, 우리가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어 테이블이 금세 꽉 차고 웨이팅이 생겼다. 우리는 운이 좋게 남들보다 조금 일찍 그곳에 갔기에 식사를 마칠 수 있었던 것이다.


늦은 점심식사를 마친 후, 달아 공원에 가서 일몰을 보기 위해 버스를 기다렸다. 하지만 버스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택시를 탈까? 아냐 곧 버스가 온다잖아. 15분 걸린대. 근데 왜 15분 걸린다 해놓고 30분이 지났는데도 안 오지? 라며 실랑이를 벌이다 결국 기다린 지 한 시간 만에 도착한 버스를 타고 달아 공원에 갔다. (이후 다년간의 경험으로 통영 시내버스정류장에 표기되는 버스 도착 예정시간은 그다지 믿을게 못된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버스를 타고 목적지의 중간쯤 가고 있을 때는 이미 해가 지고 있었고, 우리는 달아 공원이 아닌 버스 안에서 일몰을 보게 되었다. 겨울 버스의 차가운 공기에 주홍색 노을빛이 따스하게 스미자 나는 곧 몸이 나른해졌고, 그대로 잠들면 좋은 꿈을 꿀 것 같았다. 꿈과 현실의 가운데 경계 어디쯤에서 몽롱한 기분으로 창밖을 바라보자니 빛은 앞좌석부터 차례차례 쏟아져 버스 안을 주홍빛으로 물들였다. 나무 사이를 지날 때면 해가 가려져 버스 안이 깜깜해졌고, 그러다 해가 보이면 다시 버스 안이 환하게 물들며 나와 친구들의 얼굴 위에 찬찬히 내려앉았다. 우리 중 누구도 해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창 너머 바다 위로 해가 지는 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달아 공원에 도착하니 하늘은 푸르스름했고 이윽고 파란빛도 사라져 깜깜한 어둠만이 남았다. 우리는 근처 슈퍼로 들어가 뜨거운 캔커피를 손에 쥐고선 오들오들 떨며 통영 시내로 가는 버스를 한 시간 기다렸다가 타고 곧바로 숙소로 들어와 쓰러져 잤다. 그날 온종일 추위에 떨면서도 많이 돌아다녀 다들 피곤했던 터였다.


다음 날 서울로 돌아온 나는 이듬해 봄에 또 통영에 갔다. 이번에는 혼자였다. 그리고, 그 해 여름에도 갔다. 주황색 지붕이 아담하게 깔려있는 낮은 건물들, 잔잔한 물결이 일렁이는 맑은 바다, 깨끗한 해안길에서 윤슬을 바라보며 타는 자전거, 카페에 앉아 이따금씩 창 너머 바다를 바라보며 읽던 책, 친절하게 대해주는 사람들과 동네 책방까지. 나는 통영에 가면 갈수록 통영에 있는 대부분의 것들을 좋아하게 되었다. 특히나 내가 가장 좋아하고 자주 가던 곳은 미륵산 자락에 있는 미래사와, 미래사 옆에 편백나무가 우거진 작은 오솔길이었다. 통영 시내에서 택시를 타고 미래사에 가려면 편도로만 택시비가 2만 원 이상 드는 데다, 가는데 걸리는 시간도 30분으로 결코 만만한 코스는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매번 통영에 갈 때마다 그곳에 갔다. 미래사에 가면 절 안까지 들어가 부처님께 예를 갖추고 합장을 했다. 종교가 없는 나에게 그것은 종교적 행위라기보다는 '안녕하세요, 저 또 왔어요.'라는 안부인사였다. 몇 달 전에 왔는데 오늘 또 왔어요. 그러니까, 나 좀 반겨주세요.라는 일종의 어리광이 포함된. 그렇게 인사를 마치고 절 한 바퀴를 빙 둘러본 후, 대청마루에 앉아 잠시 쉬다가 절에서 나오면 편백나무 오솔길을 걸었다. 오솔길은 짧아서 왕복 20분도 채 되지 않는 구간이었는데, 길 끝에는 통영8경이 한눈에 보이는 탁 트인 전망대가 있었다. 그 전망대에 설 땐, 이 넓은 우주 안에서 나라는 사람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느껴보려 했다. 그리고 머릿속에 아무 생각도 나지 않을 때까지 계속 뭔가를 생각하며 먼바다를 바라봤다.


그렇게 좋아하던 통영이지만, 나는 2014년 3월을 끝으로 한동안 통영에 가지 않게 되었다. 발길을 끊은 결정적인 계기는 세월호 사건이었다. 2014년에 나는 그 사건을 뉴스와 페이스북으로 접하면서 정부, 언론, 경찰, 정치인들에 대한 증오와 반발심이 커졌고 그들 중 누구도, 무엇도 믿지 않게 되었다. 난 사람이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무능한 공권력에 의해 억울하게 죽고 싶지는 않았고, 21세기에 대한민국에서 설마 그런 일이 있겠냐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았다. 나는 그 사건을 보며 두려움에 분노했고, 분노는 일상에의 무력감으로 이어졌다. 일이 있고 얼마간은 자다가 갑자기 눈이 번쩍 떠지거나, 원인 모를 호흡곤란에 시달리기도 했다. 어쩌다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에서 남들이 놀러 가서 찍은 바다풍경을 보면 그 일이 생각나 한동안 바다사진도 쳐다보지도 못했고, 당연히 해안마을인 통영에도 가지 않게 되었다. 물론 통영에서 바다를 보며 억지로라도 위로 비슷한 걸 느껴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렇게 2년이 지나 2016년, 계절은 내가 통영에 처음 갔을 때처럼 겨울이 되었다. 그 무렵에는 많은 사람들이 일상으로 복귀해 있었다. 세월호 사건이 일어나기 전과 세상은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아니, 실은 진작에 다들 일상으로 복귀한 후였을지도 모르겠다. 저마다 마음속에 그 일로 인한 상처를 하나씩 품고 있는 듯 했지만,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이어가야 할 각자의 삶이 있었고 다들 그 삶에 책임을 다하는 듯 보였다. 나도 그들 중 하나였다. 다만 간혹 광화문 광장 근처를 지날 때 세월호 진상규명에 관한 전단을 받거나, 유가족들의 계속되는 시위와 고통 어린 호소를 뉴스로 볼 때면 가슴이 아팠다. 무엇보다도 누군가 유가족들을 정치세력이라 비난하며 배설한 댓글을 보기라도 한 날에는 내가 그런 댓글을 남긴 이들과 같은 인간이라는 것에 수치심을 느끼며 괴로워하기도 했다. 그래도 나는 살아가기 위해, 그 후로 굳이 그 일에 관해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지 않으며 그저 가슴속에 묻었다. 그러다 문득 다시 통영에 가고 싶어졌다.


그때도 나는 혼자였다. 나는 짐도 제대로 풀지 않은 채 숙소에서 나왔다. 한겨울인데다 이틀 전에 눈이 쏟아진 후라 공기가 얼어 날이 많이 추웠다. 그냥 숙소에서 바다 보며 책이나 읽을걸 그랬나 싶기도 했다. 왜 난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굳이 이 추운 날 서울에서 새벽부터 나와서 다섯 시간이나 버스를 타고 연고도 없는 이곳에 도착해서는 덜덜 떨면서 택시를 기다리고 있을까 싶어 좀 쓸쓸해졌다. 후드티 아래로 비죽 튀어나온 손등은 빨갛게 얼고 하얗게 터서 부풀어 올랐다. 나는 튼 손을 후드티 소매로 가리고, 얼어붙어 잘 움직여지지 않는 손가락을 겨우 움직여 콜택시 회사에 전화를 걸다가 내 앞에 택시가 한대 멈춰 서길래 그냥 그걸 탔다.


- 여행 왔는교?

- 네.


통영에서 택시를 탈 때면 기사님들은 내가 여행객임을 단번에 알아본다. 처음엔 내가 외지인처럼 보이나 싶었는데, 기사님들 입장에서 보자면 굳이 통영시내 한복판에서 택시를 타고 미래사나 미륵산이나 이순신 공원에 가달라고 말하는 사람이라면 분명 여행객일 테지... 나는 차 안에서 연세가 지긋한 흰머리 기사님께 통영에 종종 오고 있으며, 이곳은 나에게 편안함과 포근함을 안겨주는 곳이라고 말했다. 특히 지금 가고자 하는 미래사와 그 옆에 난 오솔길은 내가 통영 여행 중 가장 좋아하는 코스이며, 지금은 추워서 자전거를 탈 수 없지만 봄이나 가을에 오면 미래사 대신 여객선 터미널 근처 해안길에서 자전거를 탄다며 기사님이 별로 궁금해하지도 않을 통영 여행담을 늘어놓았다. 추운 데서 떨다가 따뜻한 택시를 타니 마음이 놓였고, 한편으로 그날따라 마음이 쓸쓸해서 누구에게든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렇게 떠드는 내 이야기를 기사님은 잘 들어주셨고, 기사님이 잘 들어주자 나는 문득 그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다. 그동안 내가 통영에 올 수 없었던 이유, 바다를 바라볼 때 느껴지던 마음속 통증과 부채감에 대해.


- 사실 저 여기 2년 만이에요. 그 전에는 계절마다 왔는데.

- 그라요? 어데 다른 데 갔습니까.

- '그때 일' 이후로 저는 도무지 바다를 볼 수가 없었어요.


나는 그날 처음 만난 기사님에게 그동안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세월호 사건 이후 나는 아무것도 믿을 수가 없게 되었다고, 내 안의 작은 우주가 그날 이후 산산조각 나버렸다고, 일상을 버티기 위해 가슴에 묻어두고 적당히 모른 척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가끔 마주하게 될 때면 나는 빚을 잔뜩 진 사람처럼 마음이 갑갑해진다고. 그래도 통영은 그동안 나의 유일한 안식처여서 이렇게 또 오게 되었지만 지금도 나의 마음은 편하지가 않다고. 난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 참. 안타깝지. 어린애들이. 어른들이... 잘했으면 살았을 긴데.


통영이 고향인 기사님은 다섯 살 때부터 바다에서 수영을 했고, 일곱 살 때부터는 해루질로 전복과 해삼을 직접 캐곤 했다. 기사님은 어릴 때부터 배를 탔는데, 아버지가 운항하는 보트에서 아버지로부터 보트의 키를 컨트롤하는 요령과 물살을 타는 법도 어깨너머로 슬쩍 배웠다. 그런데 배를 타기 시작했을 때부터 아버지를 비롯해 주위 어른들이 늘 당부하던 말이 있더란다.


- 배가 기울면 무조건 바깥으로 나와서 위로 올라가라 하데. 위로, 위로, 그게 제일 안전하다고. 배가 한번 뒤집히면 그건 누가 오더라도 원래대로 돌릴 수가 없어요. 그래 배가 무서운 거라. 배가 뒤집어질 것 같으면 젤 높은 곳으로 기어 올라가라고, 내 그래 배왔다. 육지 아들이라 바다를 몰라 그래 됐다 아이가. 해안가 아들 같으면 많이 살았을 긴데.

- 오히려 바다를 잘 아는 어른들이 가만히 있으라고 해서 그렇게 된 거잖아요. 저는 그게 너무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그 배에 내가 타고 있었대도 나는 아마 말 잘 듣겠다고... 가만히 앉아있었을 것 같아요.

- 그 마음 안다. 그래도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말아요. 되돌릴 수도 없고 어쩌겠나. 사는 게 다 그런 기라. 여행 왔으니 좋은 생각만 하고, 맛있는 거 실컷 묵고 좋은 구경만 하다 가소.


그날 기사님과의 대화를 통해, 내가 그토록 힘들었던 것은 세월호 이후 그전에 내 인생에 축적된 모든 사건에 관한 기억이 재편되었기 때문임을 알았다. 시스템 안에서 생존하기 위해 착한 누군가가 되려고 노력했던 지난날의 나는, 진짜 내가 아닌 나라는 자아에 기생해 살아가던 무언가로 기록되었다. 사회의 순리이니,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기생하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며 체념하고 침묵해왔던 나의 신념은 순 엉터리였다. 그렇다면 난 어째서, 무엇을 위해서, 내가 아닌 누군가가 되려고 그 오랜 시간을 고통스럽게 버텨왔던 걸까. 그렇다고 이제와 다른 뭔가가 되려고 해 봐도 뭘 해야 진정한 내가 될 수 있을지 나는 알 수 없었다. 2년 만에 찾은 통영은 예전처럼 나에게 편안함을 주지는 못했다. 통영은 그대로였는데, 내 안의 뭔가가 변해버려 더 이상 예전 같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 택시가 미래사 앞에 도착했다. 기사님은 혹시 통영 여행 중 콜택시 필요하면 이 번호로 연락하라며 명함 한 장을 건넸다. 미래사에 갔다가 오솔길을 산책하고 바다를 바라보며 이십 분쯤 앉아있다가 그만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몸이 으슬으슬 추웠다. 하지만 나는 걷고 싶었다. 가까운 정류장까지 가려면 족히 5km 이상, 그것도 산길을 걸어야 했지만 그래도 걷기를 택했다.


터덜터덜 걸어가는 동안 단화를 신은 발이 추위에 꽁꽁 얼어붙고, 귀는 새빨갛게 얼어 떨어져 나갈 듯 아팠고 손도 퉁퉁 부르텄다. 해가 지는 게 보였다. 바다에 스민 노을은 세상을 주홍빛으로 물들였다. 3년 전 처음으로 통영에 갔을 때 버스 안에 스며들던 빛과 같은 색이었다. 세상이 깜깜해질 무렵, 나는 걷기 시작한 지 한 시간 반 만에 시내 가는 버스정류장 앞에 도착했다. 나는 20분을 기다려 버스를 타고 40분을 더 가서 죽림동에 있는 숙소 앞에서 내렸고, 숙소에 들어가기 전 잠시 밤바다를 보러 갔다. 깜깜해진 통영 밤바다 위로 오징어잡이 선박들이 우웅-소리를 내며 출항을 준비하고 있었다.

2020.2 통영 밤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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