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는 어떻게든 흔적을 남긴다.
문제를 제대로 정의하는 것은 생각보다 꽤나 어려운 일이다.
해결되지 않는 일이나 복잡한 상황을 짚어내면 되는데 왜 어렵냐고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문제의 본질을 놓치거나 자의적으로 주관적인 원인을 끼워 넣는 실수를 범한다. 문제 접근 방식을 설명할 때 자주 언급되는 일화가 있는데, 토머스 제퍼슨 기념관 일화다.
기념관 외벽의 부식이 심해서 이유를 찾아보니 잦은 비누 청소가 원인이었다. 비누 청소를 하는 이유를 확인했는데 비둘기 배설물 때문이었다. 그리고 비둘기 배설물이 쌓이는 이유는 비둘기의 먹잇감이 거미가 많은 탓이었다. 다음으로 왜 거미가 많이 모이는지 알아보니 불나방이 많아서였고, 불나방이 많은 이유는 실내 전등을 주변보다 일찍 켜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차근차근 원인을 짚어가보니 결국 해결해야 할 근본적인 문제를 찾아낼 수 있었다. 만약 비누 청소가 문제라고 인식했다면 비누나 청소 용품을 바꾸는 등 애먼 청소부들만 고생했을 것이고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 정의의 중요성을 강조하다 보니 서두가 길어졌는데 여튼 문제 정의가 이렇게나 중요하다.
11월 어느 주말 동창들과 점심 모임을 가졌다. 직전 모임에서 친구들이 맛있는 식사를 대접해줘서 이번에는 내가 한 턱 쏴야지라는 마음에 기분 좋게 길을 나섰다. 반갑게 이리저리 근황을 나누던 중 소개팅 이야기가 나왔다. 그러다 결혼해서 아이도 있는 한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XX년생 애들이 아직도 소개팅하면 문제 있는 애들 아니야?"
내가 그 XX년생이었다. 친구의 말을 끝까지 들어보니, 요지는 최소한의 자기 관리조차 내팽개친 소수의 XX년생들을 나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함의를 이해하더라도 표현 방식이 서툴렀고 그 자리에 내가 있었기에 더욱 무례했다. 그 순간 급격히 식욕을 잃었다. 대신 식사 자리가 끝날 때까지 적절한 반응과 호응을 하며 자리를 지켜는 데 집중했다. 모두 다음 일정이 있어 짧게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길로 향했다.
처연한 주말이었다. 이렇게 말로 상처받았던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내 마음을 날카롭게 후벼 팠다. 숱한 어려움에도 포기하지 않고 버텨온 것만으로도 장하고 고맙다고 스스로를 격려했던 나의 삶이 자랑스러웠다. 친구가 30대에 남편과 함께 아이를 키우고 가정을 꾸려가는 동안 나는 전세사기와 경력 단절을 해결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의 삶 모습이 그 무엇도 아닌 '문제'로 비친다니. 나를 지탱하던 것들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다음 날 어두운 예배당 안에서 서글픈 눈물이 흘러나왔다.
아직도 싱글인 것이 문제일까? 어느새 30대가 된 것이 문제일까? 눈치 없이 소개팅에 나가는 것이 문제일까? 서두에서 소개한 일화처럼 차근차근 원인을 짚어가보니 문제는 나에게 있지 않았다. 진짜 문제는 다른 모양의 삶을 존중하지 못하고 본인의 잣대로 섣불리 판단하는 친구의 사고방식이었다. 문제를 제대로 정의한 후 점차 씁쓸한 감정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쓸쓸하고 추운 한 주를 보내며 상처는 아물어 한 겹의 두터운 융기를 만들었다. 그렇게 난 이전보다 더 단단해졌지만 마음에 남은 흔적으로 인해 종종 또다시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