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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ssaytowin May 13. 2019

논술 학원에서 겪은 일 (1/3)

학생으로, 학원 강사로, 전문 강사로



학생으로



2001년 겨울

내가 논술 학원을 처음 다닌 것은 2001년 겨울이었다. 나는 재수를 했는데, 그때에는 수능 점수가 인플레이션이 매우 심해서, 시험이 쉽게 출제되어서 만점자가 속출한 해였다. 나는 전국 7%에 속해있어서 조금 높은 대학에 진학하기를 원했다. 그때에는 현실 감각이 좀 떨어져서, 대학 원서를 쓰는 날이 언제까지인지 몰랐다. 원서는 점수에 맞추어서 형이 써주었다.


경희대와 서울시립대와 숭실대 모두 철학과로 원서를 써서 지원을 했는데, 앞에 두 대학은 떨어지고 숭실대는 예비 16번으로 겨우 붙었다. 경희대에서는 논술 고사와 면접시험이 있었다. 19년 전 일이라, 원서를 써 준 사람이 형이라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논술 전형 고사에 맞추어서 원서를 써 준 것인지, 아니면 그때에는 논술 고사를 필수로 봤던 것인지 잘 모르겠다. 암튼 그것 때문에 논술 학원을 다녔다(글을 쓰면서 기억이 잘 나지 않아서 형에게 전화를 했는데, 형은 나에게 20년 전 일을, 그것도 내 일도 아닌 일을 어떻게 기억하냐고 말했다. 그리고 잠깐 동안 옛날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내가 다닌 논술 학원

내가 다닌 논술 학원은 꽤나 유명한 곳이었다. 강사 선생님은 세 명이었고, 그중에 한 사람은 메가스터디가 만들어지기 전에 온라인 강좌를 모두에게 제공하자는 아이디어를 낸 사람이었다. 그분은 강의 시간에 자신이 국가에서 선발한 영향력 있는 100인에 선발되었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항상 피곤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그 사람은 내가 대학에 들어간 후에 얼마 지나지 않아 과로사했다). 강사 선생님들은 모두 열심히 가르쳤고, 특히 책의 한 페이지 분량의 지문을 풀어주는 방식으로 강의를 진행했다. 나는 강의를 열심히 들었고, 지식을 더하는 일에 꽤나 흥미를 느끼던 차에 시험을 보는 날까지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어느 정도 강의 차수가 진행되자, 논술을 종이에 직접 쓰게 되었고 그것을 제출하면 다음 수업 시간에 첨삭받은 것을 받게 되었다. 나는 첫 번째 첨삭을 받은 종이를 받고서 적잖이 놀랐는데, 왜냐하면 내가 글을 잘 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빨간 줄과 빨간펜으로 '두서없이'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은 부분을 찬찬히 보면서 나는 그다음부터 논술 학원에 다니지 않았다. 내가 두서없다는 표현을 쓴 이유는 전문 강사가 나의 글을 채점하지 않다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었다. 내가 다닌 논술 학원은 한 반에 100여 명 가까이 수업을 듣는 곳이었다. 엄마는 그곳에 나를 보내려고 애를 쓰신 것 같은데, 100여 명이 넘는 학생들을 어떻게 강사가 채점을 해줄 수 있겠는가?



시험 결과

시험 결과는 어땠을까? 예상한 대로 망했다. 경희대는 영어 지문도 나왔는데, 내 기억으로는 도덕경을 영어로 번역한 것 같았다. 아니면 도덕경에 관한 영어 논문이었던지. 내가 그것을 기억하는 이유는 고등학교 때부터 철학에 심취해서 꽤 많은 철학 고전을 읽은 탓이었다. 시험을 보면서 나는 논술을 하지 않고, 에세이를 써서 제출했다. 지금도 그 점은 확실히 기억이 나는데, 지문 중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 나왔길래, 나는 이미 그 책을 여러 번 읽었던 차라, 열심히 써 내려갔다. 논술 시험의 "문제"는 보지 않고, "내 마음대로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썼다.



도대체 왜!

왜 논술 학원 강사는 이 말을 해 주지 않았을까? "당신은 시험에서 당신의 생각을 쓰면 안 됩니다. 논술은 자기의 생각을 쓰는 시험이 아닙니다." 어쩌면 강사는 몰랐을 수 있다. 아니면 내가 수업을 주의 깊게 듣지 않았을 수도 있다. 기억이라는 건 언제나 한정적인 의미에서 사실에 근사치를 가질 수 있을 뿐이기에, 나도 내 기억을 정확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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