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학은 인식론이 아니라 존재론
철학적 해석학은 텍스트와 관련되어 있다. 텍스트의 성질은 매우 독특한데, 철학적 해석학은 이 독특한 부분을 어떻게 이해하고 접근하는 것이 좋은가에 관계한다. 철학적 논의만 하면 지루할 테니까 내가 경험한 것을 같이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대학원에서 만난 철학적 해석학
철학적 해석학은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에 의해서 본격적인 논의가 되었는데, 이 책은 안타깝게도 2014년이 되어서야 완역본이 나왔다. 대신에 나는 폴 리쾨르의 철학적 해석학에 의존하여 텍스트를 접근하는 방법을 익히고 적용했다. 철학과 대학원을 다니는 동안 꽤 많은 혜택을 누렸는데, 가장 큰 축복 중에 하나는 리쾨르의 저작들을 만난 것이다. 그리고 폴 리쾨르를 전공한 분과 함께 책을 읽으며 토론을 하면서 더 큰 축복을 누렸다. 얼마나 행복하고 아름다운 나의 대학원 생활이었는지! 그때에는 그 지식들이 나를 변화시킬 줄 몰랐다. 그리고 철학이 나의 재정에 도움을 주게 될 것이라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정말 꿈과 같은 이야기이다. 나는 그냥 현실감각이 1%도 없는 철학을 좋아하는 학생이었다. 이런 사람이 과연 자신의 앞가림은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그런 학생. 그렇지만 나는 5년 전에 가장 현실적인 감각을 지닌 사람과 결혼을 했고, 아이도 둘이다!
철학적 해석학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방식보다는, 내가 경험하고 적용한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왜냐하면 그것이 학생들이나 이 글을 읽는 사람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내 글을 읽고 철학적 해석학에 대해서 궁금한 점이 생겨서, 가다머의 글이나 리쾨르의 글을 읽게 되면 더 좋겠다. 그것은 내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방향이기도 하다.
철학적 해석학은 인식론이 아니라 존재론
가다머의 논의부터 시작해도 좋겠지만, 나는 리쾨르의 논의부터 시작하는 것이 더 좋다고 여긴다. 왜냐하면 리쾨르는 가다머의 논의를 이어가고 있고, 해석학에 있어 존재론적인 부분에 대한 논의를 더욱 심화시켰기 때문이다.
철학 얘기가 시작되면서 어려운 용어가 나왔다. 앞으로 여러 차례 나오게 될 텐데, 그 용어가 나올 때마다 위키피디아를 참고해도 좋지만, 그냥 그런가 보다 하면서 넘어가도 된다. 우리가 목표하는 것은 용어를 분명하게 한 후에 논의를 진행해 나가는 것이 아니다. 맥락 안에서 용어를 이해하는 여정이 우리를 목표에 도달하게끔 도울 것이라 믿는다.
철학적 해석학에 대해서는 인식론과 존재론을 비교하면서 이야기할 예정이다. 이 부분을 도식적으로 이야기를 하면 오히려 더 어려운 이야기가 될 수도 있고 이해를 더디 만들기도 할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가 기억을 하고 깨닫는 과정은 '이야기의 형식'으로 되어 있으니까.
인식론과 존재론
인식론과 존재론은 둘 다 앎과 관계가 있다. 인식론은 우리가 아는 것을 어떻게 알고 있는가에 대해서 다루고, 존재론은 인간에 대해서 다룬다. 그러니까 인식론은 앎의 결과에 대해서 관계하고, 존재론은 앎의 과정에 관계한다. 둘 다 인간이 어떻게 무엇을 알 수 있는가에 대해서 논의한다.
조금 더 풀어서 이야기를 하면, 인식론은 앎의 결과에 대해서 다루기 때문에 앎을 받아들이는 사람에 대해서 객관적인 관점을 취한다. 반면에 존재론은 사람의 독특한 인식 능력에 대해서 다루기 때문에, 앎의 합리적인 접근에 대해서 조금 심도 있는 논의를 요구한다.
무엇이 진리인가?
"무엇이 진리인가?"라는 질문에는 A와 B 중에서 어떤 것이 진리인가라는 선택하라는 뜻이 담겨 있지만 여기에서는 그런 뜻으로 쓰지 않는다. 대신에 진리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만약에 진리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어떤 텍스트를 진리라고 여기고 있는 어떤 그룹이 있다면 두 번째 의미에서의 물음이 더 유효하다.
성경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보자. 성경에 대해서 논의를 하는 것에 대해서 거북스러운 분이 계실 것 같다. 그런 분들에 대해서 미리 양해의 말씀을 드린다. 그렇지만 해석학의 시작은 신학적 해석학과 법학적 해석학이고, 철학적 해석학은 그 뒤를 잇는다. 가다머와 리쾨르는 모두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지니고 있고, 그 부분은 두 철학자의 저서에서 중점적으로 논의되는 부분이기도 한다.
나는 기독교인인데, 나는 성경의 이야기가 모두 진리라고 믿는다. 오해하지 마시길. 나는 그런 믿음을 강요하기 위해서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님을 거듭 강조한다. 성경은 과학적인 접근 방법으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영역들이 있다. 합리적이고 계몽된 이성이 바라보면 성경에 나오는 사건들과 기록들은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모두 진리라고 믿는다. 내가 그것을 진리라고 믿게 되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숙고하는 과정이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철학적 해석학은 큰 도움이 되었다.
철학적 해석학의 역할
철학적 해석학은 텍스트를 진리로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 진리를 나의 것으로 만드는 과정, 나의 것으로 만들어서 행동으로 바꾸는 결과에 관계한다. 그러니까 철학적 해석학은 인식론에 대한 학문이 아니라 존재론에 대한 학문이다(이 이야기는 가다머의 논의를 따라가면서 조금 더 자세히 하겠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 내가 경험한 일인데, 교회에서 나눈 대화이다. A 씨는 나처럼 철학을 전공한 분이라 여러 차례 재미난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느 날 성경이 어떻게 진리로 받아들여지는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기억에 남아서 여기에 옮긴다.
A: "그럼, 이상윤 씨는 성경의 한 단어 한 단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아요? 마음과 머리에 각인되지 않나요?"
나: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겠죠. 그렇지만 단어 하나하나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지는 않아요."
A가 말한 입장은 인식론적인 입장이다. 나의 입장은 존재론적인 입장이다. 나는 이렇게 덧붙인다. '만약에 그런 단어 하나하나가 나의 인식체계에서 검증이 되지 않고 나의 뇌에 각인이 된다면, 그것보다 더 강력한 폭력은 없을 거예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A 앞에서 말하지 못했다. 나는 쫄보다.
앞에서 텍스트의 독특한 특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는데, 텍스트 자체에 그런 것이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지만, 존재론적으로 접근을 하면 텍스트를 접근하는 사람에게 그런 메커니즘이 작동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다음 글에서는 소설가 김영하 씨가 <알쓸신잡>에서 한 대화로 이야기를 풀어갈 텐데, 김영하 씨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어떻게 텍스트를 대하고 있는가에 대해 확인할 수 있다. 다음 글에서는 텍스트의 속성에 대한 논의를 조금 더 진행해 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