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읽는 방법, 배운 적 있어요?
다음 글에서는 리쾨르의 해석학에 대해서 2편을 다루고, 그다음에는 가다머의 해석학을 2편 다룰 예정이다. 그리고 마지막 글에서는 대입 논술과 어떻게 해석학을 연결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다루는 게 좋을 듯하다.
참고서가 없을 때
내가 근무한 중학교는 방과후학교 시범학교였기 때문에 많은 과목이 진행되고 있었다. 방과후학교 조교는 나를 포함해서 2명, 방과후학교 부장, 그리고 4명의 교사가 더 있었다. 방과후학교 부장과 다른 선생님 한 분은 국어 교사였고, 다른 두 분은 수학과 도덕을 담당하셨다.
2009년인가 2010년이었던 것 같은데, 그때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 국어 교과서가 바뀌게 되었다. 국어 교과서가 바뀌었지만, 참고서가 아직 인쇄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학기가 시작되기 전 국어 선생님은 참고서가 언제 나오냐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 다행스럽게도 학기가 시작되기 며칠 전에 참고서가 나왔고, 국어 선생님은 수업 준비를 할 수 있었다.
글 읽는 방법, 배운 적 있어요?
나는 학생들에게 첫 수업에 이렇게 묻는다.
나: "글 읽는 방법, 배운 적 있어요?"
학생: "그럼요."
나: "그래요? 언제요?"
학생: "학교에서요."
나: "아, 문자 익힌 것 말고요, 글 읽는 방법 배운 적 있는지 물었어요."
학생: "..."
나는 국어 선생님이 수업 준비를 하면서 어떤 어려움에 처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내 기억으로는 국어 수업에는 문학 작품들을 다루게 되는데, 문학 작품의 주제에 대해서 한 단어나 문장으로 정리해 주는 것으로 시작했던 것 같다(내가 학생들에게 물어보니, 학교에서는 지금도 그렇게 수업을 한다고 들었다). 아마도 국어 선생님이 겪는 어려움은 참고서에 정리되어 있는 '주제'를 스스로가 '찾아야 하는' 상황에 놓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이 글은 학교 선생님을 비난하거나 비판하려는 의도가 담긴 글이 아니다. 절대로).
학교 선생님만 그럴까? 대한민국의 교과과정을 거쳐서 대학에 진학하고 사회생활을 한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국어 교사와 같은 처지에 놓인다. 어떤 작품이 놓여 있을 때에, 그것의 주제를 찾을 수 있을까? 주제를 찾고 다른 사람에게 설득력 있는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나는 고등학교 때에 김춘수의 「꽃」의 주제가 실존철학과 관련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고등학교 1학년 학생에게 실존철학이라니. 참고서의 도움 없이 주제를 찾아낼 수 있는가? 물론 관련된 논문을 읽으면 좋겠지만 고등학생에게 논문은 무리다. 전문분야에 대해서 더 알고자 하는 사람들이 도움을 받는 것이 논문이다(이 글을 쓰면서 검색해 보니, 김춘수 시인은 실존철학과 자신의 시가 상관이 없다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재밌는 일인데, 왜 이런 상황이 발생하는지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다시 이야기하겠다).
김영하 소설가가 텍스트를 대할 때
지난번 글에서 김영하 소설가의 이야기로 글을 시작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영하 소설가의 이야기로 글을 시작하는 이유는, 김영하 소설가가 우리 시대에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소설가이고, 방송에 나와서 자기의 이야기를 매끄럽게 풀어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김영하 소설가를 비평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고,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우리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을 담고 있다고 생각해서 김영하 소설가의 이야기를 싣는다. 그리고 김영하 씨는 소설가이지 문학 평론가가 아니지 않은가?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훌륭한 소설가이다. 김영하 소설가의 이야기에 다른 생각을 덧붙이려는 게 이번 글의 목적은 아니다(더 많이 알려진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문열 소설가도 좋겠지만, 『이문열 세계명작산책』 1권에서 이문열 소설가가 「에밀리에게 장미를」을 해석하는 모습을 보면 조금 더 엄밀한 해석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에밀리에게 장미를」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단편 소설 중에 하나이고, 내 수업에서는 꼭 다룬다).
아래는 김영하 소설가가 <알쓸신잡>에서 이야기를 한 부분이다. 캡처한 것을 올린다.
김영하: “문학이라는 것은 자기만의 답을 찾기 위해서 보는 거지, 작가의 숨겨놓은 주제를 찾는 보물 찾기가 아니다.”
앞뒤 맥락 없이 어떤 문장만 담는 것은 해석을 할 때에 매우 위험한 일이긴 하지만, 캡처한 부분이 김영하 소설가가 말하는 이야기의 요점이라고 느낀다. 위의 이야기를 질문과 답의 형식으로 바꾸어 보자.
동일한 텍스트를 대하더라도 사람마다 다양한 반응이 나타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 김영하: 작가의 의도를 작품에 담았다고 할지라도 찾아내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 철학적 해석학: 텍스트의 크기가 우주보다 크기 때문에
텍스트를 대하는 독자의 태도는 어떠해야 할까?
- 김영하: 자기만의 해답을 찾기 위해서
- 철학적 해석학: 작가가 숨겨놓은 주제를 찾는 보물찾기
나는 텍스트의 대한 이해가 글 읽기에 우선하면 어느정도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
텍스트의 성질
텍스트는 여러 가지 성질을 가진다. 우선 세 가지만 이야기를 하자면,
1. 작가의 의도를 담고 있다. 독자는 그것을 찾아야 한다.
2. 텍스트는 고정된 말하기이지만 과학적이지 않다.
3. 글을 쓸 때와 글을 읽을 때는 전혀 다르다.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사고로 텍스트에 접근하게 되면
나는 "중학교 방과후학교에서(5/5)"에서 구병모 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김영하 소설가의 이야기도 구병모 작가와 다르지 않다. 같은 시대에서 비슷한 사고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두 분을 포함해서 우리 시대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텍스트를 접근하는 방식은 거의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동일한 텍스트를 대하고 있는 여러 사람이 있는 상황을 가정해 보자.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사고로 텍스트에 접근하게 되면, 아래의 세 가지 질문에서 논의할 수 있는 부분이 적어진다. 주어진 텍스트에 관련해서,
1. 누구의 이야기가 더 설득력 있는가?
2. 우리가 어디까지 알아낼 수 있는가?
3.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참인가?
상대적인 관점으로 텍스트를 대하게 되면,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텍스트를 포함해서 역사와 문학과 철학의 성과에 대해서 논의할 때에 일종의 벽을 느끼게 된다. 이 벽은 모두의 논의가 동일한 지위를 누릴 수 있다는 점에서 나타난다. 이 벽은 우리를 어떤 울타리 안에 가두는 동시에 열린 사고와 다양성 그리고 관대함을 이야기하면서 더 많은 이야기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 같이 느끼게 만든다. 그러나 우리는 무언가를 알아내고자 할 때 우리에게 미진한 부분이 남겨진다면 여전히 그 미진한 부분을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아직 해결하지 못한 부분의 실마리는 울타리 밖에서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그때에 우리는 우리가 놓쳤던 것은 무엇이고 반성적인 사고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부분은 어떤 부분인지 알게 된다.
흥미로운 사건
가정을 해보자. 1천 년 전 A라는 사람이 일기를 썼는데, 그 일기가 무덤 속에서 발견되었다. 1천 년 후 그 일기를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일기로 접근할까 아니면 역사적 사료로 접근할까? 문학 텍스트는 문학 텍스트로 되어 있다고 이야기해 보자. 정말 그럴까? 이 문제는 글쓴이의 역할이 무엇인지 드러나게 하는 질문인데, 글쓴이의 역할이 자신의 글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게 만든다(이 논의는 리쾨르의 논의에서 다시 한번 풀어갈 예정이다).
두 가지 상황을 예로 들어 보겠다.
- 소설가가 글을 썼다. 그리고 사람들은 소설가의 글을 소설로 인정한다.
- 여행자가 글을 썼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의 글을 논픽션으로 여기고 기행문으로 인정한다.
그럼 소설가가 쓴 글은 소설이고, 여행자가 경험한 것은 기행문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까? 많은 사람들은 그렇다고 이야기를 할 것 같다. 그렇지만 나의 대답은 '아니오'이다.
2011년에 꽤 흥미로운 사건을 접했는데, 그레그 모텐슨의 『세 잔의 차』에 대한 기사였다. 그는 히말라야 오지를 여행하면서 『세 잔의 차』를 기행문으로 출간했다. 이 책은 큰 인기를 끌었고, 많은 후원을 받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 기록된 부분 중에 어떤 부분은 허위일 수 있다는 이야기를 나왔고, 그 때문에 이 책의 진정성은 의심받았다.
철학적 해석학의 도움
우리는 어떻게 텍스트를 대하는 것이 좋을까? 역사를 기록했다면 그것을 사실이라고 믿어야 할까? 문학 책을 대할 때에는 그것을 지어낸 이야기로만 믿어야 할까? 논픽션이나 르포를 보면 그것을 정말 사실로 여겨야 할까? 장르를 나눌 때의 이점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고, 어떠한 점을 신뢰해야 할까?
텍스트는 문자로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고정된 의미만을 전달할 수 있을 것이라 단정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앞에서 경험한 것처럼, 저자는 자신이 쓴 것을 자신의 의도대로 독자에게 전달할 수는 없고, 그렇게 되지도 않는다. 이 문제를 가장 손쉽게 덮어두는 방법은 상대적인 관점을 끌어오는 것이고, 더 나은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다고 믿는 방법은 철학적 해석학의 도움을 받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