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영화 논술반
"작가와의 만남"과 "영화감독과의 만남"은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학기에 작가(또는 감독)의 작품을 본다.
작가에게 편지를 쓴다.
편지를 쓴 후에는 작가에게 편지를 미리 부친다.
작가는 편지를 읽고, 학생들이 작품에서 듣고 싶은 이야기나 질문을 확인한다.
만남의 자리에서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이야기해주고, 학생들의 질문을 받는다.
사인회를 가진다.
간식을 먹는다.
내가 원했던 방향
제일 흥미로운 시간은 작품을 만든 사람을 직접 보는 일이다. 서점에서 자신의 책을 홍보하기 위해서 작가를 만날 수 있는데, "만남 시간"에는 그것보다는 조금 더 개인적으로 만날 수 있다. 왜냐하면 "만남 시간"에는 직접 질문을 하고 자신의 원하는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점은 학생들에게 유익한 시간이 된다.
내가 원하는 방향과 의도는 학생들이 문학과 영화에 대해서 조금 더 깊이 있는 시간을 가지기 하는 데에 있었다. 그러니까 영화에 나오는 배우들을 전부 섭외하면 좋겠지만, 작품에 나오는 모든 등장인물들을 만나면 좋겠지만,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으니까 만든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게 가장 좋다고 여겼다. 지난번 글에서는 영화감독과 작가와 만났을 때의 학생들의 사진을 올렸는데, 표정들이 모두 밝다. 나에게도 학생들에게도 신나는 일이었음이 분명하다.
흥미로운 시간이 끝나고
구병모 작가와의 만남을 끝내고 다음번 수업 시간에 학생들을 만났을 때에, 나는 수업 시간에 텍스트를 함께 읽고 이야기를 꺼냈다. 이 말은 일상적인 이야기였다. 내 수업에서는. 매시간 반복되는.
나: "이 작품의 주제가 뭘까요?"
학생 A: "작품의 주제를 왜 알아야 해요? 그냥 느끼면 되는 거예요."
나는 매우 당황했고, 이렇게 이야기를 했다.
나: "느끼는 것도 좋지만, 느끼는 감정을 이성으로 생각하는 것이 더 유익합니다."
학생 B: "사람마다 느끼는 게 다르잖아요. 왜 같은 것을 느껴야 하죠?"
나는 지난 시간에 "구병모 작가가 이야기한 것 때문에 그런 것 같은데"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구병모 작가는 작가이지 문학 이론을 전공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이야기를 했다. 그렇지만 내 이야기가 학생들의 마음에 들어갈 리가 없었다. 작가의 권위를 때문이다. 당시 학생들에게 『위저드 베이커리』는 대단한 인기의 작품이었는데, 독서영화 논술반을 수강하지 않는 학생들이 찾아와서 '작가와의 만남'을 가질 수 있냐고 물었다. 유명한 사람의 이야기가 더 설득력 있다고 생각하는 고정관념이 작동해서 나를 매우 곤란하게 만들었다. 나는 유명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설득하는 데에 어려움을 느꼈다(유명한 사람이 강연을 하면 어떠한 상황을 벌어지는가에 대해서 궁금하다면, 잭 내셔의 『어떻게 능력을 보여 줄 것인가』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작가와의 만남 시간에 있었던 일
구병모 작가는 학교에 와서 강연을 시작할 때에 매우 불쾌한 표정을 지으면서 시작을 했는데, 내가 그런 부분을 자극했던 모양이다. 강연을 이렇게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여러분들이 보낸 편지 잘 받았어요. 그런데 주제라는 건 없어요. 그런 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아요."
더 심한 말을 했던 것 같은데, 내가 기억하는 것은 그 정도이다. 나는 굉장한 충격을 받았는데, 왜냐하면 내가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주제 찾기'였기 때문이다. 나는 이 사건 다음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었는데, 장건재 감독의 《회오리바람》의 시사회에 가서도 감독에게 그렇게 질문을 했다(2011년 1기 방과후학교에 영화감독을 섭외하고 싶어서, 장건재 감독의 영화 시사회에 찾아갔었다).
"감독님, 근데 이 영화에서 말하는 주제가 무언가요?"
내 질문을 듣자, 장건재 감독은 적잖이 당황하셨는데, 왜냐하면 시사회에서 그런 질문을 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감독이 이렇게 얘기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냥 남녀 간의 사랑이야기죠."라고 했다. 내 질문이 작가를 불쾌하고 감독을 당황하게 하는 질문이라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내가 초청한 사람은 작가
이야기가 좀 다른 곳으로 갔다. 구병모 작가의 이야기를 다시 하면, 구병모 작가는 강연에 거의 대부분을 문학 이론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나는 문학 이론을 듣기 위해서 구병모 작가를 초청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문학 이론에 대해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면, 문학 이론을 전공한 사람을 섭외했을 것이다. 내가 원한 것은 작품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는 학생들이 작가로부터 이야기에서 궁금한 점이나 숨겨져 있는 부분들 또는 텍스트에서 찾기 어려운 부분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를 원했다(예를 들어, 학생들은 <좋은 밤 되세요>의 채민기 감독에게 영화에 나온 소품에 대해서 물어보기도 했다). 나의 의도대로 되지 않았다.
강연이 끝나고 사인회를 마치고 나는 작가를 배웅하면서 강연비를 드렸다. 나에게 심기가 불편한 표정을 보이며 "이런 거 안 주셔도 됩니다."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나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본능적으로 잘 안다. 그런 것을 잘하는 것 같다.
해석학에 매료되는 사건으로
구병모 작가의 강연은 꽤 오랜 시간 동안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때에는 참으로 미운 감정을 가지고 있었고 한동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지금은 오히려 감사하다. 왜냐하면 내가 가진 생각에 어떤 부분이 부딪힐 수 있는 부분이 있는지, 그리고 철학적 해석학에 대해서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경험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나는 텍스트를 짓는 사람과 텍스트를 해석하는 사람의 차이를 알게 되었고, 해석학은 나에게 더욱 매력적인 것으로 다가왔다.
폴 리쾨르의 말대로, 나는 "진정한 해석은 작가가 죽은 다음에 시작된다."라는 말이 타당성 있다고 믿는다. 이 이야기는 "철학적 해석학"이라는 제목의 글로 풀어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