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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비안 광 Mar 16. 2022

아이의 상상력을 이런 식으로 짓밟진 마세요

'엄마, 들어올 때 생크림 3개만 사 와!'


딸은 문자만 달랑 남기고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요즘 빵 만들기에 재미를 붙인 아이는 식빵이며, 마들렌, 리본 빵, 소금 빵이며 안 만드는 게 없다. 덕분에 뜨끈뜨끈한 식빵을 호빵처럼 호호 불어 먹는 호사를 누리고 있긴 하지만 분명 그동안 만들어 왔던 빵에는 생크림이 필요 없었는데 무슨 빵을 만드는지 궁금증이 폭발함과 동시에 짜증이 밀려왔다.


아마도 싱크대며 식탁은 초토화가 되어 있을 것이고 그릇이란 그릇은 총출동을 했을 것이다. 나름 해 놓은 설거지는 버터 기름기가 덜 닦여 미끄덩거리고 밀가루 반죽은 그대로 붙어 있겠지.


나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하필이면 알바 다녀온 날에. 빨리 저녁 먹고 치우고 눕고 싶은 날에. 들어서자마자 아이를 향해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목이 따가울 정도로. 16년 동안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엄마의 고성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 어렸을 땐 맨몸으로 받아친 엄마의 등짝 스매싱도 긴 다리로 저 멀리 도망가 허공으로 날려 버린다.


내 손을 거쳐간 모든 것들은 제자리에 있어야 하며 너저분한 꼴을 못 본다.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난리가 난다. 어린아이들이 있는 집은 어쩔 수 없이 어질러지고 뭐라도 쏟아야 아이인 것을. 잘 걸어가다 넘어지고 옷은 더러워져야 아이인 것을. 나는 끝까지 어른 취급했다. 책은 좀 찢어먹고 낙서도 하고 방바닥에 굴러다니고 그러다 펴보고 할 텐데 장식용처럼 책꽂이에 번호순대로 나란히 꽂아두었다. 장난감은 또 어땠을까. 일렬로 줄 세워 마치 매장에 와 있는 것처럼 함부로 손대지 못하게 아이들을 숨 막히게 했다. (장난감 매장도 이 정도는 아닐 듯) 나는 아이들에게 조금의 흐트러짐조차도 용납하지 않았다.

아이들 상상력 키우기에는 촉감놀이가 좋다며 방바닥에 비닐을 깔고 물감을 풀어주고 밀가루를 부어주며 놀게 했던 적이 있었다. 아마도 아이들은 그때 지옥을 경험했을 것이다. 어김없이 주의사항을 공지한 후.

"너희들, 잘 들어. 이 비닐 밖으로 물감이나 밀가루가 튀어나오면 안 돼. 알겠지?"

마냥 좋은 아이들은 얼른 놀고 싶은 마음에 찰떡같이 대답을 하고 킬리만자로의 표범처럼 날뛰기 시작한다. 그럼 엄마인 나는 흐뭇한 표정으로 보고 있을까.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손에는 걸레를 장착하고 미간 사이 주름은 날이 서고 입에서는 "야! 엄마가 비닐 벗어나면 안 된다고 했지. 야~~" 그러다가 "이제 그만해. 말 안 들을 거면 하지 마. 나와. 치울 거야." 매번 이런 식으로 무 자르듯 싹둑 잘랐다. 아이들이 신이 나서 노는 동안에 엄마는 걸레질만 하고 잔소리만 해대니 무슨 풍부한 상상력이 길러지고 무한한 사고력을 키울 수 있겠는가. 이런 머저리 같은 애미.


어제도 그랬다. 딸은 미처 챙기지 못한 엄마 생일 선물이 마음에 걸려 손수 케이크를 만들어 보답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 어떤 모양으로 만들지, 엄마의 표정은 어떨지 상상의 나래를 펼쳤을 터인데 또 그렇게 아이를 주눅 들게 만들었다. 참 못났다. 짜증 내느라 제대로 맛보지 못한 케이크를 한 조각 먹었다. 달달구리하고 폭신한 카스텔라에 묻힌 딸기가 상큼하게 입안을 감싸고돌았다. 5시간을 쏟아부은 정성이 느껴져 조금 울컥하기도 했다. 어느새 이렇게 커서 엄마를 챙기는지 고맙고 또 미안했다. 그리고 딸에게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 우리 딸 최고라고.

엄마는 영원히 스무 살로 살라며 (실은 초가 부러져서 남은 숫자로 땜빵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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