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 제가 통역을 잘 못해서요~ - 통역이 아닙니다. - 그럼 종류가 뭔데요..? - 가이드.. 입니다.
이때부터 뭔가 이상했다.
아니 처음부터 이상했다.
1. 재외국민등록 안 했는데 내 연락처를 안다
2. 모스크바 한인이 많은데 나에게 전화했다
3. 굳이 음대생에게 가이드 알바를 제안했다
갑자기 받은 대사관 전화라, 깊은 생각은 할 수
없었고 좋게 생각했다. 대사관을 사랑했으니까.
(대한민국을 사랑한다고 해야 하나)
무슨 가이드요?
- 그냥 크레믈 이런 주요 관광지들 같이 돌면서 어른 몇 분 가이드 해 주시면 됩니다. - ... 아.. 저.. 가이드를 한 번도 해 본 적 없... - 어려운 것 아니고 그냥 아주 기본적인 내용들만 설명만 해주시면 됩니다. 진행도 다 저희가 하구요, 그냥 설명만... - 제가 여기에 오래 살았어도, 관광지 설명할 만큼 아는 건 하나도 없거든요. 잘 몰라서 설명도 못하니 조금 어려울 것 같아요. 다른 사람 소개해 드리면 어떨까요? - 아, 그러시면 그냥 아이패드 보시면서 그대로 읽기만 하셔도 됩니다. - 저 아이패드 없는데요?
대사관 직원은 잠시 말이 없다가 ㅋㅋㅋㅋ
그러면 책을 가져와 보고 읽어도 된다고 했고
나는 책도 없다고 말했다. (사실이었다)
이쯤되니 이상했다. 뭔가 이상한데.
마치 이미 나로 결정한 뒤 전화한 느낌.
높은 페이에 거저 먹어도 될듯한 가이드.
이 희한한 알바는 나와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특별한 장점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알바 후 한식당 저녁식사도 함께 하시라'는
것이었다. 이런 꿀알바가 있다니!
다른 건 거절해도 밥 사준다는 제안만큼은
거절하지 않는 한식러버 유학생인 나에게.
보통 날 어려워해 어차피 그런 경우 드물음
분명 한식당 보너스는 큰매력 포인트였다.
짧은 순간 머릿속에 그림이 쫘악 그려졌다.
어른 단체이면 요리 메뉴도 많이 시키겠지.
그럼 여러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겠네!
점점 조르는 듯한 느낌은 착각이었을까.
책을 드릴테니, 그대로 읽기만 하면된다,
잘 못해도 된다, 계속해서 나를 설득했다.
-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해볼게요. - 감사합니다. - 그런데 날짜랑 시간은 언제이죠?
날짜를 들어보니, 약 일주일 가량 후였다.
알겠다고 하고 끊으려는데 다급히 말했다.
예행연습
- 아, 그런데 그전에 저희가 만나야 합니다. - 네?! - 만나서 예행 연습을... - 무슨 연습이요??
음악하면서 연습이란 단어는 수 없이 들어도
관광객 가이드 예행 연습은 처음 들어본다...
황당해하는 나에게 두번째 제안이 들려왔다.
- 페이는 예행연습 때도 똑같이 드릴게요.
어, 잠깐, 뭐라고?
예행 연습을 하는데 페이를 똑같이 준다고?
그럼 아까 말한 페이의 2배를 금세 버는 것?
이상한데 더 이상했다.
- 가이드 하는데.. 무슨 연습을 해요?
내가 너무 못할까봐 걱정이 되는건가..?
그렇게 걱정되면 다른 사람을 쓰지, 왜 굳이
부탁에 부탁을 거듭하며 연습하자는 걸까?
- 아, 너무 중요한 일정이라 미리 만나서..
약간 헛웃음이 나오는 것을 숨기지 못했다.
- 이번 주 일요일에 잠깐만 만나면 됩니다. 오래 안 할 거구요, 오후 2시에 한시간 미만..
- 일요일 2시요? 아, 그럼 어차피 안 되겠네요. 교회 가야돼서요. 죄송해요, 안 될 것 같아요.
잘됐다 싶었다. 뭔가 내 일이 아닌 것 같다.
- 아.. 하루만.. 어떻게 안 될까요? - 안 되요. 한인예배가 2시에 시작이라서요. - 그러면 12시는 어떠신가요? 제가 시간을 변경해 보겠습니다. - 그 전에 미국교회에 가서요. 안 되겠네요.
전화를 끊고 싶어졌지만 전화예절을 중요하게
생각하므로, 대화를 끝내고자 박차를 가했다.
대사관 직원이 불쌍하다는 느낌이 들기는 했다.
어쩌면 나의 인류애가 지나쳐서일 수도 있지만
아무튼 뭔가 이 사람도 미션이 있는 것 같은데..
간곡히 부탁하는 느낌까지 드는 건 착각이겠지.
- 저는 정말 안 되니, 다른 사람을 알아보고 다시 연락 드릴게요.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어른을 잘 대할뿐더러 사교성이매우 뛰어나,
그들을 말면 말았지(?)결코 말려들지 않을법한.
(직감상, 약한 애는 보내면 안 될 것 같았달까)
- 아.. 직접 해 주시면 좋겠는데...
이제 내가 그를 설득해야 했다.(대체 왜)
심지어 달래는 느낌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
- 사교성 엄청 좋고 어른들 잘 대하는데, 얼굴도 예뻐요. 물어보고 연락드릴게요.
얼굴도 예쁘다는 말을 나도 모르게 강조했다.
왠지, 그래야 전화를 끊을 것 같았던 것 같다.
아닐 수도 있지만 직감으로는 알던 모양이다.
- OO아, 혹시 주일 12시에 시간 되니? - 언니~ 안녕하세요~~ 무슨 일이세요? - 대사관에서 전화가 왔는데 - 대사관이요?
물어보니, 안 될 일정이라
- 언니! 그럼 OO이는 어떨까요?? 일요일에 시간 되고 알바 원하거든요.
- 그래, 알았어. 연락해 볼게.
다른 후배는 고맙다며 대단히 기뻐했다.
"언니, 열심히 준비해서 잘 할게!"
의지 샘솟는 후배를 보며 마음이 든든했다.
언니, 나 잘렸어.
며칠 후 복도에서 마주친 후배의 표정이 매우
좋지 않았다. 의아해하는 내게 그녀가 말했다.
- 그분이 나 마음에 안 들어 하시는 것 같아. 나 잘렸어. 언니를 되게 원하시는 것 같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