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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ssie Mar 31. 2024

VVIP (1)

대사관에서 온 전화

< 지잉 ~ 지이잉 ~~ >

모르는 번호였다.


'누구지?!'


의아한 기분으로 전화를 받았다.

- Алло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여기 대사관입니다.

- Алло? (여보세요?)
- 여보세요?
- 아, 여보세요..?
- 안녕하세요, 혹시 이OO씨 되시나요?
- 네, 맞는데 누구..
- 안녕하세요, 여기 대사관입니다.

대사관? 왜? 그보다,

대사관이 내 연락처를 알고 있었나..?


그때부터 대사관의 구애(?)는 시작되었다.

즉슨, 하루 아르바이트 해 줄 사람이 필요하며

제시한 페이는 코트라 통역 알바비보다 높았다.

(이보다 높은 하루 알바비는 없다고 보면 된다)

- 아.. 제가 통역을 잘 못해서요~
- 통역이 아닙니다.
- 그럼 종류가 뭔데요..?
- 가이드.. 입니다.

이때부터 뭔가 이상했다.

아니 처음부터 이상했다.


1. 재외국민등록 안 했는데 내 연락처를 안다

2. 모스크바 한인이 많은데 나에게 전화했다

3. 굳이 음대생에게 가이드 알바를 제안했다


갑자기 받은 대사관 전화라, 깊은 생각은 할 수

없었고 좋게 생각했다. 대사관을 사랑했으니까.

(대한민국을 사랑한다고 해야 하나)


무슨 가이드요?


- 그냥 크레믈 이런 주요 관광지들 같이 돌면서 어른 몇 분 가이드 해 주시면 됩니다.
- ... 아.. 저.. 가이드를 한 번도 해 본 적 없...
- 어려운 것 아니고 그냥 아주 기본적인 내용들만 설명만 해주시면 됩니다. 진행도 다 저희가 하구요, 그냥 설명만...
- 제가 여기에 오래 살았어도, 관광지 설명할 만큼 아는 건 하나도 없거든요. 잘 몰라서 설명도 못하니 조금 어려울 것 같아요. 다른 사람 소개해 드리면 어떨까요?
- 아, 그러시면 그냥 아이패드 보시면서 그대로 읽기만 하셔도 됩니다.
- 저 아이패드 없는데요?

대사관 직원은 잠시 말이 없다가 ㅋㅋㅋㅋ

그러면 책을 가져와 보고 읽어도 된다고 했고

나는 책도 없다고 말했다. (사실이었다)


이쯤되니 이상했다. 뭔가 이상한데.

마치 이미 나로 결정한 뒤 전화한 느낌.


높은 페이에 거저 먹어도 될듯한 가이드.

이 희한한 알바는 나와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특별한 장점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알바 후 한식당 저녁식사도 함께 하시라'는

것이었다. 이런 꿀알바가 있다니!


다른 건 거절해도 밥 사준다는 제안만큼은

거절하지 않는 한식러버 유학생인 나에게.

보통 날 어려워해 어차피 그런 경우 드물음


분명 한식당 보너스는 큰 매력 포인트였다.

짧은 순간 머릿속에 그림이 쫘악 그려졌다.

어른 단체이면 요리 메뉴도 많이 시키겠지.

그럼 여러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겠네!


점점 조르는 듯한 느낌은 착각이었을까.

책을 드릴테니, 그대로 읽기만 하면 된다,

잘 못해도 된다, 계속해서 나를 설득했다.

-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해볼게요.
- 감사합니다.
- 그런데 날짜랑 시간은 언제이죠?


날짜를 들어보니, 약 일주일 가량 후였다.

알겠다고 하고 끊으려는데 다급히 말했다.


예행연습


- 아, 그런데 그전에 저희가 만나야 합니다.
- 네?!
- 만나서 예행 연습을...
- 무슨 연습이요??

음악하면서 연습이란 단어는 수 없이 들어도

관광객 가이드 예행 연습은 처음 들어본다...

황당해하는 나에게 두번째 제안이 들려왔다.

- 페이는 예행연습 때도 똑같이 드릴게요.

어, 잠깐, 뭐라고?

예행 연습을 하는데 페이를 똑같이 준다고?

그럼 아까 말한 페이의 2배를 금세 버는 것?


이상한데 더 이상했다.

- 가이드 하는데.. 무슨 연습을 해요?

내가 너무 못할까봐 걱정이 되는건가..?

그렇게 걱정되면 다른 사람을 쓰지, 왜 굳이

부탁에 부탁을 거듭하며 연습하자는 걸까?

- 아, 너무 중요한 일정이라 미리 만나서..

약간 헛웃음이 나오는 것을 숨기지 못했다.

- 이번 주 일요일에 잠깐만 만나면 됩니다.
오래 안 할 거구요, 오후 2시에 한시간 미만..

- 일요일 2시요? 아, 그럼 어차피 안 되겠네요.
 교회 가야돼서요. 죄송해요, 안 될 것 같아요.

잘됐다 싶었다. 뭔가 내 일이 아닌 것 같다.

- 아.. 하루만.. 어떻게 안 될까요?
- 안 되요. 한인예배가 2시에 시작이라서요.
- 그러면 12시는 어떠신가요?
제가 시간을 변경해 보겠습니다.
- 그 전에 미국교회에 가서요. 안 되겠네요.

전화를 끊고 싶어졌지만 전화예절을 중요하게

생각하므로, 대화를 끝내고자 박차를 가했다.


대사관 직원이 불쌍하다는 느낌이 들기는 했다.

어쩌면 나의 인류애가 지나쳐서일 수도 있지만

아무튼 뭔가 이 사람도 미션이 있는 것 같은데..

간곡히 부탁하는 느낌까지 드는 건 착각이겠지.

- 저는 정말 안 되니, 다른 사람을 알아보고
 다시 연락 드릴게요.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어른잘 대할뿐더러 사교성이 매우 뛰어나,

들을 말면 말았지(?) 결코 말려들지 않을법한.

(직감상, 약한 애는 보내면 안 될 것 같았달까)

- 아.. 직접 해 주시면 좋겠는데...

이제 내가 그를 설득해야 했다. (대체 왜)

심지어 달래는 느낌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

- 사교성 엄청 좋고 어른들 잘 대하는데,
 얼굴도 예뻐요. 물어보고 연락드릴게요.

얼굴도 예쁘다는 말을 나도 모르게 강조했다.

왠지, 그래야 전화를 끊을 것 같았던 것 같다.

아닐 수도 있지만 직감으로는 알던 모양이다.

- OO아, 혹시 주일 12시에 시간 되니?
- 언니~ 안녕하세요~~ 무슨 일이세요?
- 대사관에서 전화가 왔는데
- 대사관이요?

물어보니, 안 될 일정이라

- 언니! 그럼 OO이는 어떨까요??
일요일에 시간 되고 알바 원하거든요.

- 그래, 알았어. 연락해 볼게.

다른 후배는 고맙다며 대단히 기뻐했다.


 "언니, 열심히 준비해서 잘 할게!"

의지 샘솟는 후배를 보며 마음이 든든했다.


언니, 나 잘렸어.


며칠 후 복도에서 마주친 후배의 표정이 매우

좋지 않았다. 의아해하는 내게 그녀가 말했다.

- 그분이 나 마음에 안 들어 하시는 것 같아.
나 잘렸어. 언니를 되게 원하시는 것 같던데.

크게 당황했다. 무척이나 당혹스러웠다.


무려 주한 대사관이라 믿고 후배를 보냈건만

예행연습 뒤 자르다니. 사과에 사과를 거듭했다.


그냥 언니가 하지 그러냐는 표정으로 꺼낸

비수 같은 한 마디가 가슴을 찌르듯 꽂혔다.

- 언니, 거기 예쁜 사람 원하는 것 같아.
자꾸 사과하지 마. 언니 잘못도 아닌데.

민망한 마음을 뒤로 하고 저녁 약속에 나갔다.

가장 좋아하는 카페 Le Pain Quotidien에서

가장 온화한 성품의 벗과 담소를 나누는 중에,

갑자기 유난스럽게 내 폰의 진동이 울려댔다.

- 엇...

바로 받지 않자, 왜 그러냐는 듯 쳐다본다.

- 하아.. 이거 대사관 같은데..

- 대사관이요? 대사관에서 왜 누나한테
 전화를 걸어요?

느낌이 안 좋았다. 후배가 잘린 그날 밤 다시

나에게 전화하는 이유를 알고 싶지 않았으나

전화를 피할만큼 회피형은 아니므로 받았다.


안녕하세요, 여기 대사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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