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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ssie Mar 18. 2024

러시아에 왔다

절묘한 타이밍 1

러시아에 왔다.

하필 이 시기에.


사실은 오고 싶지 않았다.

비행기를 좋아했으나 나이 든 건지 몸이 지친건지

어디로든 출국 자체가 귀찮았다.


게다가 모스크바를 떠난 지 무려 10여년이다.

나는 3월의 모스크바 길바닥이 어떤지 아주

잘 알고 있다. 전쟁 때문에 한국 카드사 일체가

러시아 결제를 막았으므로 결제 방법을 따로

알아보는 것도 스트레스였다. 거기에다, 항공

직항이 사라졌으니 경유를 선택해야만 했다.


옛날에는 이곳에 아직 남은 친구들이 여럿 있었고

교수님셨지만, 전공 교수님은 돌아가셨고

오르간 교수님은 은퇴, 친구도 남아있지 않으니.

이제 여행객처럼 따로 숙소를 잡아야 하고 밥도

사 줄 가족은 한 둘 뿐, 언어도 10년 이상 한 적이

없으니 버벅댈 것이 눈에 선했다.


나는 보통 사전에 미리 알아보고 1,2,3의 옵션을

마련해 최악의 돌발 상황에도 의연히 대처할 법한

플랜을 가져가는 것을 선호하는데, 이번 일정은

그야말로 갑자기 "빨리 다녀와야 하는" 상황에

마치 등 떠밀리듯 일주일 전에 티켓을 사고, 공항

출발 15분 전 악보를 끝내서 발송하고 나왔다.


짐을 잘 못 싸서 캐리어를 열어두고 한 달 전부터

그냥 하나씩 투척하다 리스트를 체크해 빠짐없이

가져간다면 좋았겠지만 실상은, 출국 당일 새벽

3시 반까지 밀린 청소, 분리수거, 짐 싸기를 했다.


제정신일 리 없었다.


캐리어를 들어보니 너무 무거웠다.

겨울 옷 때문인가. 거의 없는데.. 청바지를 뺐다.

와보니 외출복 바지가, 입고 온 바지 하나였다..


공항 체크인 카운터에 무거운 캐리어를 올리자

12kg 숫자가 보였다. 20kg인 줄 알았는데.....


인천공항에서부터 뭔가 느낌이 애매했다.

대개 가벼운 차림인데 나 혼자 털이 풍성한

모자 달린 패딩. 롱패딩이 아닌 것으로 감사했다.


탑승 시 내 온몸은 이미 땀으로 절여져 있었다.

출발도 안 했는데 마음은 두바이 샤워실이었다.

Emirates도 십여 년 만이다. KAL보다 편도가

싸다고 추천받아 두바이를 경유하던 귀국 당시

기내에서 만난 내 이상형은 아직도 못 잊지.....

ㅎㅎㅎㅎㅎ (심지어 마주 앉아, 괴로웠던 기억)


감히 에미레이트 비즈니스를 탈 수 없었기에

48시간 전 열린다는 사전좌석 지정에 성공해

이코노미 중 가장 앞의 두 번째 열 복도에 앉았다.

장거리에서는 구름보다 화장실을 택하겠어하고.


같은 날 뜨는 두바이행 A380 안 타길 잘했다

생각했다. 사람이 거의(?) 없었다. 이렇게 사람

안 태우고 연료 값 괜찮나 싶을 정도로 없었다.


혹시 누워도 괜찮을까 용기를 내도 괜찮을까

식사 후 눈치를 보는데 이미 아랍 아저씨가

다리를 뻗고 거의 누워 있었다. 용기를 얻었다.

내 옆자리 쫘악 빈 모습. 이륙 직전의 EK325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사정과 상황상, 탑승 전 10여 일 넘게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뭘 좀 알아보느라 땀 뺐다.

그러다 출국 당일 새벽까지 짐 싸고 저녁

8시 반까지 하루종일 밥 먹을 시간이 없어

쫄쫄 굶다 라운지에서 맛없는 밥을 급하게

먹고 탑승했으니, 9시간 반의 비행여정과

두바이 경유시간과 그 이후 또 비행시간이

솔직히 아득하고 좀 끔찍하기까지 했달까.


그런 나에게 누울 수 있는 기회라니.

이게 바로 신이 주신 기회가 아니면 무언가!


그렇게 감사하며 누워 자다가 밤에 목이 말라

나답게 승무원을 부르기보단 직접 가서 물을

받아오고자 블록을 지나 뒤편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나는 매우 당황했다.


사람이.... 꽉 차 있었다. 한 자리도 비어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이렇데 사람이 많은 줄 꿈에도

몰랐.. 생각해 보니 내가 탑승마감 딱 5분 전에

들어가서, 다수의 탑승 모습을 못 본 것이었다.


내가 눕는 것은 기적이었다.

그렇게 나는 부족한 잠을 채워 자며 회복했고

두바이 샤워도 성공한 뒤 5여시간 후 두 번째

비행기에 탑승했다. 수 시간이 지난 후 도착이

가까워진 시각, 생전 안 보던 뉴스 헤드라인을

클릭하자 내 눈동자를 커다랗게 만드는 제목이

입을 떡 벌리게 만들었다. 적어도 그 비행기에서

도착지가 모스크바인 한국인은 내가 유일했으니

그 기사 제목을 보고 경악할 사람은 나 뿐이었다.


to be continued


이곳에서는 정치적인 내용을 다루지 않습니다.
한 한국인이 10년 만에 온 모스크바에서
그저 사람과 추억을 만난 이야기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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