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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ssie Apr 01. 2024

VVIP (2)

대사관의 "귀하신 분들"

안녕하세요, 여기 대사관입니다.


반갑지 않았다.


한시간만 더 늦었다면 전화를 아예 받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안 친한데 밤에 전화하는 사람도

싫고, 더구나 공공기관이니 선 넘은 느낌이었다.


대사관 측은, 친구분이 맡기 어려울 것 같다며

나에게 맡아달라고 재차 부탁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일요일 밤, 가이드는 당장 내일이었다.

열심히 준비한 사람은 만나보더니 잘라버리고

전혀 준비하지 않은 나에게 맡아달라 조른다..?


이제 나도 기분이 점점 안 좋아지고 있었다.

명확한 이유 없이 일방적 캔슬을 통보한 점.

예행연습 페이는 받았지만 실전은 취소되어

이 일로 후배에게 상처를 주게 되지 않았나.


하.. 진짜... 설마했는데. 후배 추측이 맞다면
예쁜 애는 따로 있는데 왜.. 하다 답을 찾았다.
그애는 가족이 여기 있고 S사 회장 방문시에도
엄청 칭찬 받았댔지. 급이 높아 못 시키나보다.
만일 정말 그런 의미라면, 난 만만했던 것인가.


최대한 좋게 생각하려 했는데 이제 안 되겠다.

한 번 정하면 나는 매우 단호하고 냉정해진다.


- 저는 안 된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 한 번만 부탁드립니다.
- 정말 안 돼요. 준비도 안 했고, 안 되요.
- 그냥 오셔도 됩니다. 한 번만 도와주세요.
- 제 후배가 굉장히 열심히 준비해갔는데,
 어떤 문제가 있었나요?
- 아.. 그분은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 저도 안 돼니 다른 분 찾아보셔야겠네요.
- 당장 내일이라 사람을 구할 수가...
- 그럼 제 후배를 시키시면 되잖아요.
 오늘 후배가 예행연습을 잘 못했나요?
- 아... 그냥 직접 와서 해주시면...


친구를 앞에 두고 대사관과 실랑이를 벌이자니

아무래도 빨리 끝내야겠는데,  직원도 얼마나

곤란한 것인지 이제는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그래서 물어보았다. 안 궁금해 안 묻던 그 질문.

이제는 궁금했다.



누가 오는데 그러세요?


- 아니, 누가 오는데 그러세요?
- 아주 중요한 분들이 오셔서...
- 어떤 중요한 분들인데요?


뭐, 대통령이라도 오니? 그래도 안 가~

이 분위기에 절절매면서도 답을 꺼렸다.

그럼 끊던가. 하.......

- 아주 귀한 분들이 오셔서 그렇습니다.
VVIP 이세요....


VIP도 아니고 VVIP란다. 그게 누구인데?

나도 귀한데? 내 앞에 앉은 사람도 귀하고.

세상사람 다 귀한데 뭔 귀한 분들이 오시..

- 그러니까 그분들이 대체 누구시길래
저한테 이렇게까지 하시냐고요.


내 말투는 마치 '야, 대체 누가 오는데 나한테

이렇게까지 전화해서 뭐 하자는 거니' 같았고

이제 가면이든 거품이든 간 볼 처지가 아니니

대놓고 조르던 대사관 직원은 결국 실토했다.



국회의원 분들이십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미안한데 지금도 웃고 있음. 이 생각만 하면

미안한데 너무 웃김. 미안, 정말 미안합니다)


기대는 안 했는데 묘~하게 실망했다.

아쉽게도 국회의원은 나에게 VVIP가 아니었다.

몇 명인지도 들었지만 중요치 않아 곧 잊었다.


나에게 사람은 VVIP가 될 수 없는 것 같고,

VIP라면 적어도 Krystian Zimmerman정도?

크리스티안 침메르만이 오신다면 가이드를 몸소
공부하여 예행연습 5번 하고 갈 생각이 있..지는
않고 멀리서만 보고 싶겠지만 아무튼 ㅎㅎㅎ


국회의원 여러 명이라니 더 안 끌리고

이렇게까지 나를 데려가려는 노력을

이제는 좋게만 봐줄 수 없어 거절했다.


단호하게, 칼 같이.
절대로 안 되는 것을
확실히 알려주듯이.


사실 난 어릴 때부터 정치인을 꺼려했다.
의사 검사 변호사 정치인 사람 그 자체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나, 그 분야에 있다면
내 두뇌구조와 매우 대조적이라 아마 서로
깊이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 여겼을지도.
(지금 생각은 좀 다르나 성향차이는 팩트)


다만 이 과정 중 나만 혹은 후배만 믿고 있다

발등에 불 떨어진듯한 대사관 직원의 입장을

아주 외면하기에는 나도 책임을 느꼈으므로,

- 그럼 제가 다른 사람 소개해 드릴게요.
- 아....


솔직히 한편 일부러 더 그 사람을 택했다.

이쯤되면 여러모로 적합한 인물이었다.


정말, 정말 미안하지만.. 그녀의 쌍꺼풀 수술

후유증이 아직 풀리지 않아 개인적으로 얼굴

오래 마주하기는 아직 조금 부담스러웠..으나

믿음 좋고 성격 좋고 언어 능력은 최고치였다.


그녀가 간다면 서로가 100% 안전..할 것이니

난감 상황 발생률 zero에 수퍼 토박이 급이라

가이드는 뭐 식은 죽 먹기, 페이 좋지, 일 쉽지,

그녀에게 착 맞는 알바였다.


그 자리에서 그녀에게 연락해 성사되었다.

가이드의 상대는 한국의 국회의원들이며,

혹시라도 밥은 먹지 말고 오라고 조언했다.


윈윈. 나랑 그녀의 윈윈.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마치 복수 같았다.

복수는 내 성향에 어울리지 않지만 말이다.


예행연습에 참여했던 내 후배를 자르면, 바로

다음 날이고 이미 밤이라 알아볼 겨를도 없어

내가 와 줄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는지 모르나

대사관 직원은 결국 내 얼굴을 보지 못했다.

생애 유일하게 거절한 한식당 식사 기회였다.


어떻게 알았을까?


통화를 지켜보던 온유한 성품의 내 친구가

처음으로, 자기도 화나려 한다고 말해왔다.

- 내 연락처는 도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 누나 대사관에 재외국민 등록 안 했어요?
- 안 했어. 확실히 안 한 게, 그거 볼 때마다
나도 할까? 하면서 결국 한 번도 안 했거든.
- 그럼 어떻게 안 거지..
- 내 말이. 내가 학교 집 교회 밖에 안 가는데.
혹시 코트라인가? 근데 코트라 알바도 두 번
밖에 안 했고, 거기에 대사관 사람 없었잖아.
- 그러니까요.
- 아, 소름 돋아.
- 대사관에, 아는 사람 정말 하나도 없어요?
- 없어. 아~주 옛날에 10대 때에는 많았는데
지금 한국 대사관 쪽 전혀 몰라, 간 적도 없고.
오히려 미국이랑 영국 대사관 사람들을 알지..


머릿속에, 억울할지도 모르는 코트라 관계자

두 얼굴이 지나갔다. 혹 뭐라고 말한 건가.

근데 내가 그 정도 얼굴은 진짜 아닌데....


답은 어차피 미스터리였고, 본의 아니게

우리의 대화는 '대사관'으로 마무리 되었다.



- 그때 가이드 잘했어??
- 네 언니~ 잘했어요~
- 돈도 잘 받았고?
- 네 언니 감사해요~~~


예상대로 그녀는 가이드를 잘해냈고

대사관 직원은.. 모르겠다. 혼났을까????


그 뒤 종종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도
이런 일이 있었다면, 정말 예쁜 사람들은
얼마나 고생할까. 연예인 걱정은 하는 게
아니라지만 어여쁜 남녀를 보면 우려된다.

어릴 때부터 동생이 받아온 선물을 구경하고
먹었다. 잘 생기면 주변에서 가만두질 않는다.
심지어 이웃이 아빠께 찾아와 기획사 연결해
주겠다고 설득하다 실패했고, 예고시절에는
대형기획사 매니저가 오래 쫓아다녔다던데
끝까지 칼거절했다고. 옛날에 LG폰 인터넷
전용 CF도, 지인이 하도 얘기해 한 번 갔다
뽑혀서 재미삼아 어색하게 찍고 왔다고.

어쩌면 동생을 위한 내 기도 응답일 수도.
연예인이 되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 ㅎㅎ

음악적으로 뛰어나나 아동 음란물 소지 및
범죄 논란이 있었던 P가, Lozakovich를
스위스에서 자꾸 만나 챙기고 반주해 주면
영 걱정되는 그런 마음...

< 지켜줬으면. 이 사람들 지켜줬으면... >

원래 있던 오지랖이 한층 더 생겼을는지도.




그 때, 대사관의 요청대로 갔다 한들,

일이 생겼을 것이라 생각지는 않는다.

좀 봐주고 가 줘도 나쁘지 않았을 수도.


그러나, 그 과정이 너무 별로였고,

돌아가도 내 선택은 거절이었을 것이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후배를 보내지도 않았겠지.


그 후 한국 대사관에서 다시는

나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누가 VVIP인가?


국민이 VVIP가 되는 그런 날은
이 세상에 맞이하기 어려울까?
 
마침 모스크바에 다녀왔고
거기에다 곧 국회의원 선거라서인지
잊고 있던 해프닝이 묘하게 떠올랐다.
 
그날 이후로 나에게 대사관은
'사랑하는 것들' 목록에서 내려왔다.
 
그래도 지금 러시아에 잡힌 한국인은
대사관에서 힘 써주었으면 하는 마음.


내가 좋아하던 모스크바의 대한민국 대사관 예쁜 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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