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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ssie Apr 02. 2024

최초로 한국인 체포

절묘한 타이밍 2

새벽 3시의 두바이 환승은 음식보다 안마의자가 중요하지만 먹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신의 은혜로우심으로 일반석에서 다리뻗고 누운

10시간 15분의 비행 뒤, 두바이에서 5시간 35분

대기시간이 있었다. 두바이 공항도 십여 년 만이다.

라운지에 이르자마자 샤워실을 찾았다. 비록 땀에

절은 옷을 다시 입어야 해도 씻지 않을 수는 없었다.

겨울용 패딩을 들고 다니는 사람은 오직 나뿐인  

확실했다. 곱고 선한 인상을 장착한 남자 직원이

샤워실로 안내 후 무척 신중하게 문을 닫고 나갔다.

우리 집 욕실보다 훨씬 크네. 춤추며 씻어도 될 판.

춤을 췄다는 뜻은 아니다


한산한 새벽. 경쟁률 세다는 안마의자에 앉았다.

제대로 사용해 본 적이 없어 일단 앉고 버튼 조절을

하는데 잘 안 됐다. 팔이 꼈는데 ㅈ을 것 같았다.

팔에 공격이 들어오면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듯

내 팔은 너무 소중하기 때문에 안마의자의 공격이

거세지는 찰나 가까스로 빼내며 정지를 눌렀다.

개인적으로, 오른발이 왼발보다 소중한 이유는

피아노 페달을 잘게 밟아야 하기 때문이고

발보다 팔이 소중한 이유 역시 악기에 있다.


 위주로 안마를 받고 싶었으나 아무리 어깨

버튼을 눌러도 몇 분 후면 척추를 타고 내려가

엉덩이를 강타하며 두두두두두 싸우자는 건가...


아아아아아아아~~~~ 오오오~ 우우 아아아~

이옹~ 우아 아아아~~~~ 오오옹~~~~


낯설어야 할 텐데 왜인지 낯설지 않은 아랍 특유

전통 노래가 공항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눈은 감으면 그만, 냄새는 코를 막으면 그만이나,

소리는 귀를 막아도 들리는 법. 더군다나 내 귀는


기도시간인가 보구나. 생각보다 시간이 길어서

나도 함께 기도했다. (주기도문)


C타입 케이블만 챙겨 기내 폰 충전이 불가했다.

그래, 아무리 에미레이트라도 충전 포트를 전부

업데이트하기에는 돈이 많이 들겠지. 그리고

내가 비행기를 너무 오랜만에 탔다. 아니, 그보다

출국 당일 새벽에 침을 챙겨서 일어난 일이다.


기내에서 잘 먹고 잘 잤어도 뇌가 갑자기 정상화

된 것은 아니었기에, 나가기 15분 전에야 라운지

카운터에 충전 부탁할 생각 떠올랐다.

전원이라도 끄고 맡길걸. 고맙다고 하고 받아보니

로 충전이... 이래서 보조 배터리를 들고 여행

가는구나... 뒤늦게 깨달았지만 나는 여행이 아니..

DME-DXB구간은 늘 A380이다
기내 음악에서 만난 심수봉 가수의 "나의 신부여"

이제 5시간 40분만 더 가면 모스크바에 도착이었다.

내 옆사람은 노어를 하는, 러시아인과 다른 외모였다.


일전 Emirates에서는 승무원에 반할 정도였으나

이번에는 묘한 인종차별 느낌의 순간들이 있었다.

본의가 아니더라도 내게 작은 실례를 했다는 것을

알면서 사과하지 않는 일이 두 탑승 중 연속이었다.

신기하기도 했다. 이런 일 연속 드물, 아니 처음인데.


불쾌했으나 따질 위인은 아니라, 기내식을 영어로

묻는 그녀에게 "저 러시아어 합니다."라고 말했다.

원래 같으면 귀찮아 그냥 영어로 메뉴만 말할텐데

생각해 보니, 십여 년 만에 러시아인에게 말한 듯.


양손을 모으며 놀란 제스처. 아무튼 태도는 바뀌었다.

민망해하는 듯했달까. 내가 말도 못 하는 동양인인 줄

알았다가 뭔가 아 깔보지 말아야겠다 이런 느낌까지..

씁쓸했지만 태도가 바뀌는 편이 나으니 그래 뭐~


처음으로 기내 건의사항 탭에, 아랍&러시아 승무원

릴레이 예의 결핍에 대해 결국 적어 접수했다.

그들의 이름을 적지 않았으나 개인이라기보다 한국,

그리고 동양인으로서 그냥 입 닫고 싶진 않았달까..

이 '없어 보이는' 동양인에게 그저 "미안, 실수였어"

한마디 던졌다면 정말 아무렇지 않았을 텐데.


잠들 여유까지는 없었다. 기억도 나지 않는다.

뉴스를 열어 보았다. 영알못이어도 어차피 영, 독,

아랍어이므로 선택의 여지없이 로이터 영어버전을

눌렀다. 에미레이트는 실시간 뉴스를 보여준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망본답시고 누른

로이터 헤드라인에, 러시아가 처음으로 한국인을

체포해 감옥에 넣었다는 기사가 보였다. 깜짝 놀라

등받이에서 등이 저절로 떼어졌다. 영어 기사에

그렇게 집중하기는 처음이었다. 착륙 한 시간 즈음

남기고 다시 로이터를 열어보자 이미 업데이트되어

사라진 대신, BBC헤드라인에 같은 내용이 떴다.

BBC / Russia detains South Korean man..
착륙 1시간 전 내가 본 실시간 속보 "러시아가 한국인 구속"

몇 개월 전이었다고는 하나, 공개된 시점은 그야말로

모스크바 공항 도착 직전이었다.


타이밍도 이런 타이밍이 있을까?

절묘라는 단어가

이보다 더 잘 어울릴 수 없을 것 같았다.


'아, 나 곧 내리는데...'


구속된 그분이 너무 걱정되면서도, 곧 내릴

자신이 신경 쓰이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었다.


한국이 미국과 같은 제재 노선을 타면서

푸틴이 "한국 너네 자꾸 그러면 재미없어"

한 것을 스치듯 기사에서 보았던 것 같다.

뉴스를 잘 안 봐서, 놓치는 기사가 90%


대한민국은 '비우호국'이 되어 요즘 공항에서

한국인을 무조건 잡는다는 소문을 들었다.


랜덤인 것도 같으니 안 잡히면 좋겠다,

잡히면 시간 좀 때우지 뭐,

잘 말해서 빠져나가보자 정도였다.


하지만 체포도 했다니, 그것도 간첩혐의로..

한 명 본보기 식으로 누명을 씌우는 것 같았다.

이런 누명이라면 누구든 쓸 수 있잖아.

공항에서 출입국 심사 도중 마음만 먹으면,

의심스럽다고 잡을 수 있는 건데.


내가 러시아 입국을 너무 만만하게 보았나

하는 생각이 처음으로 머릿속을 스쳤다.


< 딩 ~ >


안전벨트 사인 불과 함께 활기찬 기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우리는 모스크바 Domodedovo

국제공항에 도착할 예정이니 안전벨트를 매고

등받이를 바로 하라는 안내와 함께, 승무원들이

검사하러 돌아다녔다. 이제 내리는구나.

모스크바와 한국을 수도 없이 오갔지만 이렇게

오랜만에, 심지어 전쟁 중 비우호국가의 국민으로

방문하기는 처음인 내게, 점점 모스크바 땅을 향해

내려가는 비행은 그 어느 순간보다도 절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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