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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ssie Apr 22. 2024

경찰에게 붙잡혔다

feat. 삥 뜯기기

유학시절, EMS를 몸소 받으러 찾아갔는데 여권을 안 가져왔다. 이런 바보가 있나. 빈손으로 돌아오던 메트로에서 큰 키에 모자를 쓴 콧수염 경찰이 성큼 다가왔다.


여권 보여주시죠


그 시절 러시아 경찰 일부는 마치 동네 양아치와 흡사했다. 유학생들은 회색 옷을 입은 그들을 '쥐떼'라 칭했다. 여권과 거주등록증이 있으면 괜찮지만, 나같이 실수로 안 챙겨 오면 딱 걸린 셈. 우리에게 벌금은 '삥'과 같았고 그들에게는 복권당첨 또는 보너스와 비슷했다. 나에게서는 관광객 분위기가 나지 않아 보통 세우지 않는데, 그날 어떻게 알고 딱 잡았는지. 그야말로 가는 날이 장날이었다.

여담이지만 언젠가 푸틴이 경찰들의 이러한 행태를 알고 외국인 불시 여권검사를 전면 금지시켰다던 뒤로는, 정말 단 한 명의 경찰도 더는 삥을 뜯지 않았고 그때 비로소 그 몹쓸 문화가 완전히 뿌리 뽑혔다.


집에 가만히 있었으면 다음 날 받을 것을 괜히 나와서소포도 못 받고 경찰에게 붙잡히고.. 살던 세월이 있으니 무섭진 않았지만 매우 귀찮아졌음을 직감한 나는 아주 태연한 듯


"아~~ 여권은 깜박했지만 학생증이 있습니다~"

"학생증은 소용없고. 여권 보여주시지요."

"아~ 그러면 여권 복사본이 있어요, 자 여기!"


복사본을 들고 뚫어져라 보던 경찰이 말했다.


"이건 당신이 아니잖아요."

"저 맞는데요.."

"아니, 이건 절대로 당신일 수가 없음. 따라오셈."


사실, 경찰이 말한 '당신일 리 없다'는 그 말만큼은 이해가 가는 대목이었다. 왜냐하면 그 여권사진은 역대 초특급 노안샷인 데에다 내가 보아도 남 같고, 지인들도 한마디 꼭 보태는 희한한 사진이었기 때문이다. 누가 나를 천 개의 얼굴이라 했던가 나도 모르는 나의 얼굴 누구세요


처음 들어간 지하철 내부 작은 경찰서(?)에 따라 들어갔다. 반경 1.5미터 앞 작은 감옥 철장 안에 갇힌 두 명의 불법체류자 중 한 명과 눈이 마주쳤다. 세 걸음이면 닿을 가까운 거리에서 저런 negative한 눈빛 혹은 절망적인 낯빛을 마주하기에는, 나도 나를 돕지 못해 잡혀온 마당에 도울 수 있는 일이 없어서 시선을 피하게 되었다.


일단... 저 미니 감옥은 너무 좁아서 나까지 들어가기는 어렵겠... 물론 넣으면 들어가야겠지만 저기는 진짜 아니라고 본다... 하지만 쫄리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지. 쫄리지도 않아.


세상 여유롭기로 작정한 듯 나는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며 세월아~ 네월아~ 어차피 일정도 이제 없고 돈도 없고 있어도 안 줄 것이니 마~음대로 해라~ 분위기로 껌까지 꺼내 씹으며, 풀려나기 위한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다. 20여분이 지나자 경찰이 슬슬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아까 내 실물 학생증을 보았기 때문에 불법 체류일 리 없음은 경찰도 알 것. 만일 내가 누구라도 시켜 여권을 가져와 보여준다면 즉시 게임 오버. 하지만 부탁하기엔 민폐이고 귀찮아 그럴 생각도 없었지만 있는 척도 약간. 그 뒤부터 휴대폰 가지고 놀기. 서로 다 알면서 하는 눈치게임.


"집에 빨리 가고 싶죠?"

"별로, 오늘 딱히 괜찮습니다^^"

"그래도 빨리 가야 하지 않을까요?^^^"

"괜찮다니까요. 수업도 끝났고 아~무것도 없어요.^^^^"


답답함을 넘어 초조해진 듯한 경찰이 망설이다 물어왔다.


"음.. 초콜릿 좀.."

"엥..?"

"초콜릿 살 돈 좀 있을까요?"

"아~"


아이고 그렇겠지 싶었다. 그의 표정은 꽤나 미묘했다. 웃는 듯 안 웃는 듯 이상하게 미묘한.


학생에게 용돈을 달라는 다 큰 어른의 뻔뻔한 표정 같으면서도 삥을 뜯으며 양심의 가책을 아주 조금은 가진 부끄러운 듯한 표정. 하지만 기회를 놓칠 순 없어. 꼭 뭐라도 받을 것이라는 그 설렘.



근데 돈이 진짜 없어요.



"에이 그러지 말고 한 번 보셈"

"정말임. 돈 진짜 안 갖고 나와서 지갑에 50루블인가 60인가 밖에 없음." (당시 2천원 정도)


이제 나갈 때가 된 것 같아 자랑스럽게 지갑을 열어 보여주었다. 행운으로 50루블 한 장 10루블  장뿐이었다. (여권도 안 가지고 나왔지만... 돈도 제대로 안 가지고 나온 나를 칭찬해 본다...)


지갑 사정을 본 경찰은 나보다 안타까워하며, 그럼 그거라도 주고 가라고.... 그래도 50루블만 달라고 했다. 20루블은 양심상(???) 남겨줘야 할 것 같았나 보다.



여권만 있었다면 겪지 않았을 일이었지만 어쨌든 여러 경험이 있어서인지, 공항에서 잡힌다 해도 딱히 두려운 마음이 들지는 않을 것 같았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이번 입국도 여권(국적)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라는 점.


그런데 체포는 조금, 아니 많이 다르잖아.


착륙 전 기내에서 읽은 속보는, 우려 없던 나에게 처음으로 경각심과 긴장감을 전달해 주는 것 같았다.


러시아를 무섭게 느낀 적 없으나 러시아 감옥은 무섭다. 게다가 간첩혐의는 씌우면 그만이니 작정하고 덤비면 이길 방도가 없잖아. 그간 러시아어 한 적도 없는 데에다 오늘 머리도 특별히 안 돌아가는데. 생각보다 분위기가 많이 험난한 것이 분명했다. 아, 너무 오랜만인데. 타이밍이 안 좋네.


그렇게 나는 약 10여년 만에 밟은 모스크바 공항의 여권 심사장 앞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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